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파리에 대한 몽상적 소묘
아마도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해외 여행을 생각한다면 많은 분들이 그 첫 순위에 프랑스의 파리를 꼽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파리는 세계 모든 도시들 가운데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입니다. 특히나 여름철의 경우 자신만의 바캉스(휴가)를 위해 파리지앵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여행자들이 파리를 점령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파리를 찾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같은 역사적인 볼거리를 그 이유로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파리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 파리는 관광과 그다지 상관 없는 작은 골목에서도 어떤 낭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이방인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파리에 머무는 내내 이방인들은 우연한 만남 같은 낭만적 사건을 기대하며 몽환적 상태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리의 낭만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파리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 파리는 특별한 CG처리 없이 사극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과거를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파리지앵들 또한 이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두리지역에 새로 지은 아파트보다 낡고 오래된 고풍스러운 주택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취향을 보통 우리는 레트로(복고)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파리의 매력은 바로 그 레트로한 특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고적이란 것은 과거를 박물관에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현재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파리에는 의외로 레트로한 취향이 반영된 현대적인 정서 또한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악을 예로 들면 파리는 고풍스러운 클래식만큼이나 세련되고 감각적인 일렉트로 라운지 음악 또한 멋지게 어울립니다. (유명한 라운지 음악 앨범들이 파리의 클럽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Rendez Vous In Paris 파리에서의 만남> 또한 파리의 레트로한 맛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음악을 담고 있는데요. 이 앨범의 시작은 건반 연주자 필립 새스와 가수이자 배우인 자스민 로이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재즈를 좋아하는 분이시라면 필립 새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건반 연주자로 스무드 재즈 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죠. 반면 자스민 로이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는데요. 원래 캐나다 출신인 이 여성은 캐나다에서 재즈 보컬 및 뮤지컬‘록키 호러 픽쳐쇼’의 배우로 세계를 돌며 활동하다가 2002년부터 파리에 살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리에 살면서는 프랑스 록 오페라의 고전 ‘스타마니아’ 와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등에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팝스타’, ‘스타아카데미’ 같은 프랑스 텔레비전의 신인 보컬 발굴 프로그램의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필립 새스와의 만남도 바로 2002년 ‘팝스타’ 프로그램 우승자의 앨범을 제작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앨범을 녹음할 것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은 하필 파리를 주제로 삼았을까요? 그것은 두 사람의 묘한 엇갈림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필립 새스는 현재 미국의 L.A에 거주하고 있지만 원래는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한 파리지앵이었습니다. 반대로 자스민 로이는 말씀 드린 대로 캐나다의 퀘벡 출신이지만 현재는 파리에서 살고 있지요. 그러므로 이 두 사람에게는 파리가 중요한 연결고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파리를 추억하고 있는 건반연주자와 파리에 살고 있는 보컬의 만남이었으니 앨범이 레트로한 취향과 현대적인 감각이 어우러진 사운드를 지니게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파리를 주제로 한 이상 앨범의 제작 방식은 매우 단순합니다. 프랑스 샹송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 두 사람이 선택한 곡들은‘Sous Le Ciel De Paris 파리의 하늘 아래’를 시작으로 샤를 트레네가 만든 ‘Que Reste-t-il De Nos Amours 우리의 사랑에서 무엇이 남았나요?’, 조르쥬 브라상스의 ‘Les Copains D’abord 친구들이 우선이지’, 이미 재즈의 고전이 되어버린 조셉 코스마의 ‘Les Feuilles Mortes 고엽’, 미셀 르그랑의 영화 음악인 ‘Les Parapluies De Cherbourg 쉘부르의 우산’, 그리고 프란시스 래의 영화 음악 ‘Un Homme et Une Femme 남과 여’, 그리고 세르쥬 갱스부르의 ‘Je Suis Venu Te Dire Que Je M’en Vais 떠나겠다고 말하러 왔다네’등 프랑스 샹송의 고전들입니다. 사실 현재 프랑스 대중 음악은 바리에떼 프랑세즈(Variété Française)라 불리며 보다 영미 팝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곡들이 프랑스 대중 음악의 현재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의 프랑스 대중 음악은 세계 대중 음악에서 지금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샹송의 고전들을 선택한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는데요. 결국 프랑스 대중 음악에 대한 세계인들의 취향은 레트로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필립 새스와 자스민 로이는 이 샹송의 고전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연주하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음악적인 부분을 담당한 필립 새스가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는 스무드 재즈 스타일에서 최선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앨범은 다운템포가 중심이 된 라운지 뮤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시종일관 몽환적인 동시에 에로틱하다 싶을 정도로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키보드와 담담한 전자 리듬, 그리고 여기에 정서적 디테일을 살짝 드러내는 기타, 색소폰, 트럼펫이 어우러진 사운드는 분명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프랑스어의 매력을 살린 자스민 로이의 신비로운 보컬이 그 위를 흐르면 어느새 사운드는 파리로 감상자를 이끕니다. 그렇게 해서 레트로한 동시에 모던한 라운지 음악이 완성됩니다.
앨범을 위해 필립 새스와 자스민 로이는 역시 파리가 고향인 마크 앙뚜완(기타)을 비롯하여 릭 브라운(트럼펫), 마커스 밀러(베이스) 등의 특급 연주자들을 부르는 한편 프랑스적인 맛을 더해줄 수 있는 흥미로운 인물들을 초빙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민 배우 제라드 드파르디유가 ‘La Chanson d’Hélène 엘렌의 노래’에서 중후한 목소리로 영화 같은 낭독으로 프랑스어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주고 있고 영화 음악의 거장 프란시스 래가 자신의 곡인‘Un Homme et Une Femme 남과 여’에서 아코데온을 연주하며 프랑스적 낭만을 부드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Les Parapluies De Cherbourg 쉘부르의 우산’에서는 자스민 로이의 프랑스어로 노래에 알 자로가 영어로 대화하듯 노래하고 있어 색다른 느낌을 전달합니다.
한편 이번 앨범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파리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필립 새스와 자스민 로이에게는 이것도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앨범은 각 곡들의 뮤직 비디오를 담은 DVD를 보너스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보너스라 하기엔 그 영상들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데카당스한 매력을 담고 있는 자스민 로이를 따라 관광 명소부터 작은 골목 까지 파리의 곳곳을 자유로이 산책하는 이 영상들은 감상자에게 관광이 아닌 파리지앵으로서의 삶을 꿈꾸게 합니다. 그리고 그 흑백 톤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파리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말 파리에 가면 어떤 낭만적 만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파리에서의 만남을 그리며 앨범을 들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