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허버트는 영국 출신의 여성 보컬이다. 그녀는 2003년 기타 연주자 윌 루터와 함께 <First Songs>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의 위치는 재즈 보컬이었다. 이것은 두 번째 앨범 <Bittersweet and Blue>로 이어졌는데 나는 이 앨범에 담긴‘Everytime We Say Goodbye’를 잊을 수 없다. 그녀의 스모키 보이스에 담긴 사랑 후에 찾아오는 이별의 쓸쓸함은 줄리 런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스탠더드 재즈를 계속 노래했다면 분명 기네스 허버트는 뛰어난 백인 보컬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면 평범한 보컬로 남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음악적 이상은 노래 잘 하는 보컬을 넘어 자신의 색으로 감상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취향 또한 단순히 재즈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국제적 관심을 가져다 준 앨범 <Bittersweet and Blue>만 해도 스탠더드 곡들 사이에 제니스 이언, 포티쉐드(Portishead), 닐 영의 노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곡들을 그녀는 포크, 록, 블루스 등의 장르를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노래했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재즈가 여전히 강해 그녀의 포크적 감성은 노라 존스의 변형의 하나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른 노라 존스가 되기를 거부했다. 세 번째 앨범 <Between Me and the Wardrobe>를 통해 그녀는 재즈에 머물지 않고 장르를 가로질러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자작곡으로만 채운 이 앨범으로 그녀는 노래만이 아니라 음악 자체로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싱어송라이터로 인정 받았다.
그녀가 보여줄 그녀의 세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은 독자적 서사를 지닌 멜로디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사운드, 그리고 매력을 넘어 마력을 발산하는 보컬이 어우러져 감상자를 다시 한번 사로잡는다.
먼저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자신의 초기 음악적 근간을 이루었던 재즈와 더욱 멀어진 대신 포크와 록에 더 가까워진 음악을 들려준다. 특히 채도와 명도를 낮춘듯한 복고적인 질감의 사운드는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 다수를 이루는 런던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앨범 타이틀‘All The Ghost’를 가사로 담고 있는 ‘Annie’s Yellow Bag’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이 곡에서 그녀는 자신의 개성 뒤로 비틀즈나 그 후예라 불렸던 킹크스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한다.
한편 창법에 있어서 백인 재즈 보컬이나 포크 가수의 담백함을 넘어 록적인 에너지를 드러낸다. 조니 미첼에서 비욕(Bjork)나 PJ 하비를 아우른다고 할까? 이러한 변화는 앨범에 담긴 강한 자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앨범 수록곡 가운데 네 곡이 ‘Annie’, ‘Lorelei’, ‘Jane’, Nataliya’등 여성,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닌 개성 강한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실제 이 곡들은 거칠지는 않지만 강렬한 록 혹은 블루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앨범의 첫 곡 ‘So Worn Out’, ‘Jane Into A Beauty Queen’, ‘My Mini & Me’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첫 만남의 기억 때문일까? 위에 언급한 곡들도 모두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래도 기네스 허버트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은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실린 ‘Some Day I Forget’이 아닐까 싶다. 회한과 쓸쓸함이 묻어 있는 이 곡은 그녀의 재즈 시절을 상기시킨다. 이어 사랑의 느낌을 단순, 담백하게 그리는 팝 발라드 형식의 ‘My Narrow Man’-기네스 허버트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다-또한 한국 감상자들의 취향에 부합되리라 생각한다.
자신만의 개성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개성을 타인에게 인정받기란 그 이상의 어려운 일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는 스탠더드 재즈 보컬의 길을 거부한 기네스 허버트에게 주변 사람들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걱정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개성을 갖추는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감상자의 감동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앨범이다. 이제 이 앨범 이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밴드를 지휘할 줄 아는 음악인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PS: 아! 마지막 곡 ‘Some Days I Forget’을 들은 후 곧바로 플레이어를 정지시키지 말기 바란다. 이 곡 뒤에는 흥미로운 히든 트랙이 담겨 있다. 바로 데이비드 보위의 ‘Rock ‘n’ Roll Suicide’가 담겨 있는데 비록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만 노래되었지만 이 곡은 이번 앨범에서 그녀가 이전 보다 더 록에 강한 친화력을 보이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