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시간 속에서 살면서 삶이 한 단계 성숙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마치 중학생 시절 제대로 풀지 못했던 문제를 고등학생이 되어 어려움 없이 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성숙이란 것은 단순히 경험이 양적으로 축적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만 많은 사람은 삶의 실용적인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을 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을 가로지르는 폭 넓은 시야를 갖기 어렵다. 성숙은 다양한 경험들이 하나로 모여 신비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질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험의 단순한 양적 축적의 결과가 아니기에 성숙은 사람마다 다양한 경로로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가 선택한 이 앨범의 주인공인 베벨 질베르토가 막 질적인 도약을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기존 자신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보다 성숙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 앨범을 녹음하기 전까지 그렇고 그런 음악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2000년부터 그녀가 선보인 석장의 앨범들은 모두 평단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그녀를 브라질 대중 음악을 미래로 이끄는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해주었다. 특히 첫 앨범 <Tanto Tempo>는 보사노바, 삼바 등으로 대표되는 브라질의 리듬 중심의 음악을 존중하면서도 여기에 세련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덧입혀 보다 현대적인 브라질 사운드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나는 이 앨범을 녹음할 무렵에도 그녀가 한 단계 음악적으로 도약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2004년에 발매된 두 번째 앨범 <Bebel Gilberto>에서는 첫 앨범과 대조적으로 브라질의 향취가 보다 강조된 어쿠스틱 성향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첨단과 전통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던 데에는 첫 앨범 이전까지 축적된 그녀의 다양한 음악적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1966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보사노바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기타 연주자이자 보컬인 호앙 질베르토(João Gilberto)였고 어머니는 브라질 음악의 또 다른 중요 인물인 치코 부아르께(Chico Buarque)의 누나이자 자신 또한 유명 보컬이었던 미우샤(Miúcha)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스트러드 질베르토가 베벨 질베르토의 어머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스트러드 질베르토는 호앙 질베르토의 첫 아내였고 두 번째 아내가 바로 미우샤였다.) 이렇게 유명 음악인들을 부모로 두었기에 그녀가 음악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9세부터 어머니와 함께 카네기 홀 무대에 서는 등 자연스레 활동을 시작해 브라질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후 1991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뉴욕에서 카에타노 벨로주 등 브라질 음악 선배들 외에 토와 테이, 시버리 코퍼레이션 등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인들과 함께 작업했다. 이어 1990년대 후반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아몬 토빈 등과 활동하면서 음악적인 폭을 넓혔다. 그 사이에 브라질을 수시로 오갔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베벨 질베르토의 궁극적 관심은 브라질의 음악적 전통과 영미 일렉트로니카, 팝 음악의 새로운 감수성을 두루두루 체험한 것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았다. 2007년에 선보인 앨범 <Momento>가 이를 말해주는데 이 앨범에서 그녀는 영미 음악계에서 습득한 현대적인 감각과 혈통적, 운명적으로 타고난 브라질적인 정서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도만큼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이 보장되는 버브 레이블로 이적하여 제적한 이번 네 번째 앨범은 다르다. 드디어 그녀가 바랬던 브라질 전통 음악의 순수한 맛과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이상적 비율로 결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사운드를 제시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양한 스타일의 평화로운 공존을 시도했다고나 할까? 실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스타일을 기준으로 여러 그룹으로 나뉜다. 붉게 석양이 물드는 한 해변에서 들으면 좋을 듯한 편안한 분위기의‘Canção de Amor’와 ‘Nossa Senhora’, 아버지 호앙 질베르토의 곡을 노래한 경쾌한 분위기의‘Bim Bom’, 브라질의 유명한 보컬이자 배우였던 카르멘 미란다의 히트 곡을 노래한 싱그러운 분위기의‘Chica Chica Boom Chic’등은 우리가 그 동안 상상해 온 바로 그 브라질을 그리고 있다. 반면 밥 말리의 곡에 포르투갈어로 가사를 붙여 새로 노래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Sun Is Shining’, 스티비 원더의 곡을 70년대의 펑키한 분위기로 재해석한 ‘The Real Thing’, 그리고 다운템포와 록적인 정서가 결합한 듯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Secret’은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적극 활용하여 도시적인 정서를 그린다. 여기에 앨범 타이틀 곡 ‘All In One’을 비롯하여 ‘Forever’, ‘Port Antonio’같은 곡들은 양자의 장점을 결합한 듯한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처럼 다채로운 구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그녀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여러 뛰어난 음악인들을 프로듀서로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실제 앨범에는 브라질리언 걸스의 멤버이기도 한 디디 구트만,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앨범 제작으로 유명한 마크 론슨, 보사노바의 대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손자인 다니엘 조빔, 비스티 보이즈의 앨범 제작자로 유명한 존 킹, 현 브라질 대중 음악을 이끌고 있는 칼리뇨스 브라운 등 다양한 경력과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곡마다 다양한 조합으로 자신의 제작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작, 편곡에 직접 참여하고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제작자에 의해 다양한 스타일의 사운드가 공존한다는 것에서 이번 앨범을 백화점식 구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실제 앨범을 듣다 보면 다양한 편성의, 다양한 질감의 사운드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듯 이질적인 맛 없이 서로 잘 어울리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됨은 무엇보다 이 앨범의 주인인 베벨 질베르토의 보컬에 기인한다. 사실 베벨 질베르토의 보컬은 짙은 호소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또 그만큼 곡 안에 하나의 서사를 집어넣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편하게 물 흐르듯이 부를 뿐이다. 그럼에도 이번 앨범에서도 그녀는 사운드에 따라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섬세하게 반응하며 곡마다 변화를 보여준다. 예로 ‘Bim Bom’에서는 싱그러운 아침을 맞은 소녀의 모습으로, 그리고‘Port Antonio’에서는 슬픔을 극복하려는 듯 담담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편‘Secret’에서는 어떠한가? 짙은 스모키 화장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육감적인 팜므 파탈적인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가?
결국 이번 앨범의 매력은 다채로운 질감의 사운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그에 맞추어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는 베벨 질베르토의 보컬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음악적 역량의 양적 종합을 넘어선 질적 성숙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베벨 질베르토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새로이 발전시킨-All In One!- 그녀의 현재를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