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행복으로 바꾸는 노래와 연주
삶을 살면서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이 하나의 일, 한 방향에 집중될 때 그 이룸은 훨씬 빨라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가 대가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악기를 바꾸지 않고 장르를 넘나들지 않으며 수입 년간 한 우물만 파온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장인 연주자들을 보면 정말 다른 스타일의 음악에 대한 욕구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아무리 그 장르가 익숙해서 불편함은커녕 자유를 느끼고 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관성에 젖어 자신의 음악을 잊게 되지는 않을까? 장르 내에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독특한 표현욕구를 느끼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르를 가로지르며 자유로운 음악을 펼치는 연주자 혹은 보컬들이 참 많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출신의 5인조 그룹 ‘Room Eleven’음악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여성 보컬 얀느 슈라와 기타와 작곡을 담당한 아리엔 몰레마를 중심으로 토니 로(키보드) 루카스 돌스(베이스) 마르텐 몰레마(드럼)으로 구성된 이 그룹의 음악은 매우 자유롭다. 그렇다고 나만의 무엇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복잡 난해한 음악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이들의 장점은 기존의 여러 음악 스타일을 자유로이 활용한다는데 있다. 이들의 음악은 광의적으로 재즈로 분류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재즈도, 포크도, 소울도, 록도 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닐 수도 있는, 말 그대로 기존의 장르적 구분을 가로지르는 음악이다. 이러한 가로지름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 구분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라기보다 이들이 감상자적인 차원에서 음악을 한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무리 특정 음악을 좋아하는 감상자라고 해도 꼭 그 특정 음악만 종일 듣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해도 재즈를 주로 듣긴 하지만 필요에 따라 클래식도, 팝도, 록도, 월드 뮤직도, 포크도 듣는다. 그리고 그 필요란 나의 기분, 정서의 요구를 말한다. Room Eleven’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자유로운 음악은 새로운 형식을 만들겠다는 음악적 고민이 아니라 곡을 만들고 연주할 때 자신들이 느끼는 음악적 정서를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지난 2006년에 발매된 첫 앨범의 타이틀 <Six White Russians & a Pink Pussycat>만 봐도 쉽게 이해된다. 이 앨범 타이틀은 ‘여섯 명의 백인 러시아인과 한 마리 분홍색 새끼 고양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칵테일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떤 맛인지 나 역시 맛보지 못해 어떤 것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칵테일 이름이 앨범 타이틀로 사용된 것은 특정 장르 안에서의 자유보다는 장르를 가로지르는 자유를 담은 음악, 오로지 자신들의 일상적 느낌을 자유로이 표현한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실제 이들의 의지는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어 전 세계적으로 플래티넘(백만 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그리고 이 큰 성공에 힘입어 이들은 곧바로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두 번째 앨범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 두 번째 앨범은 미국에서 녹음되었다. 네덜란드가 아닌 미국에서 두 번째 앨범을 녹음하게 된 것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다이나 커츠(Dayna Kurtz)에 대한 얀느 슈라의 애정 때문이었다. 두 번째 앨범을 기획하기 전에 얀느 슈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다이나 커츠에게 듀엣 앨범에 대한 의사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다이나 커츠는 이에 대해 기꺼이 하겠다는 답변을 하면서 얀느 슈라 외에 ‘Room Eleven’의 멤버 모두를 미국으로 부르고 자신이 애용하는 스튜디오를 빌리고 직접 제작자로 나서는 한편 ‘Not Jealous’에서 직접 얀느 슈라와 듀엣으로 노래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뜻밖의 후원 속에 제작된 이 두 번째 앨범은 첫 앨범에 이어 장르를 가로지르는 자유로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역시 앨범 타이틀에서부터 감지된다. 이번 앨범 타이틀 <Mmm… Gumbo>에서의 ‘검보’는 바로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즈의 전통적인 스튜 요리를 말한다. 이 스튜요리는 뉴 올리언즈의 역사적인 성격처럼 미국 외에 프랑스, 스페인의 요리법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따라서 이번 앨범이 장르를 가로지르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앨범에는 재즈, 포크, 록, 팝 등이 다채롭게 교차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공존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이것은 역시 음악 형식에 대한 고민보다 정서적인 요구에 더욱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을 단순히 보다 폭 넓은 감상자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상업적으로 정교하게 계산된 것, 흔히 말하듯 다소 폄하의 의미를 담은 팝 재즈로만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정서적 요구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행복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싶다. 실제 ‘We Didn’t Come Here To Be Satisfied’라고 말하는 첫 곡‘Hey Hey Hey’이나 실연을 이야기하는 ‘Lalala Love’등 앨범에 담긴 곡들 대부분은 상실, 슬픔, 삶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노래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이들이 다소 우울한 주제를 노래하더라도 우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울을 위로하고 극복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브라스 섹션의 활용 편안한 리듬, 그리고 현실보다는 몽환적이고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보컬로 이루어진 사운드는 어두움보다는 밝음에 가까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편 전반적으로 이번 앨범의 사운드는 다소 명도가 한 단계 낮은 듯한 느낌,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루가 나른해지기 시작하는 오후 네 시 풍경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얀느 슈라의 보컬은 마치 낡은 라디오에서 들리는 듯한 질감으로 지난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이 때문에 지치고 피곤한 감상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의 맛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현재가 어렵더라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면 좋은 기억만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한편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자유로운 사운드는 몇 해전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핑크 마티니나 파리 콤보 등의 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과 비교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그렇다고 이번 앨범이 우울한 사람들만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감상자들에게도 ‘Room Eleven’의 음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들에게 이번 앨범은 시간의 틀 안에서 바쁘게 흘러가는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게 하는 여유의 음악으로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특히 꽉 짜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자유 시간이 주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상자들에게 장르를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Room Eleven’의 음악은 그 숙제와도 같은 시간을 부드럽게 메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