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발굴한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가오는 앨범
최근 많은 사람들이 유럽쪽 재즈 연주자와 그 앨범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대륙 국가들 같은 주요 유럽 재즈 국가들 외에 헝가리, 핀란드, 폴란드, 벨기에 등 유럽에서도 재즈의 변방으로 생각되었던 국가들의 연주자와 앨범들까지 소상하게 꿰뚫고 있는 애호가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
유럽쪽 재즈가 국내에서 새로이 관심을 받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재즈가 이제는 미국이 아닌 세계의 음악으로 보다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재즈의 굵은 역사적 흐름과 상관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즈를 감상하는 것이 주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의 재즈를 접하게 되면 재즈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 않던가? 게다가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유럽쪽 재즈 연주자들의 앨범을 살펴보면 한국적 정서에 맞는 서정적 멜로디가 강조된 앨범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이런 나의 판단은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1970년에 태어난 벨기에 출신-그러나 혈통적으로 보면 그는 이탈리아계다-의 피아노 연주자 미셀 비세글리아의 경우도 새로이 발견한 보석 같은 느낌을 주는 연주자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원곡에 내재된 멜로디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연주
신인이 아닌 이상 한 장의 앨범으로 한 연주자의 음악을 이렇다 저렇다 이해하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선택한 앨범 <Inner You> 만큼은 미셀 비세글리아라는 한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미셀 비세글리아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이 앨범은 먼저 그가 얼마나 뛰어난 멜로디 감각을 지녔는지 실감하게 해준다. 그는 왼손의 역할을 최소화 하면서 오른손을 통해 멜로디가 지닌 서정미를 강조하는 연주를 펼친다. 또한 그가 만들어 내는 멜로디는 과도한 장식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음들만 경제적으로 사용하여 풍부한 정서적 감동을 멜로디 안에 담을 뿐이다. 악보 상태로 잠재되어 있던 멜로디의 서정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고나 할까? 이것은 특히 기존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 더 잘 느껴지는데 이를 위해 앨범의 첫 곡“Sandino”에 관심을 기울여 보기 바란다. 분명 미셀 비세글리아의 감성에 의해 새로이 직조된 곡이지만 이 곡을 만들고 폴 모시앙, 제리 알렌과 트리오로 직접 연주했던 찰리 헤이든 특유의 존재감 또한 그대로 드러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Simone”도 마찬가지다. 랄프 타우너가 자신의 앨범 <Anthem>(ECM 2001)에서 12현 클래식 기타로 연주했던 이 곡을 미셀 비세글리아는 기타를 그대로 피아노로 옮겨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원곡의 차분한 시정(詩情)을 최대한 살리면서 연주한다. “Paisellu Miu”은 어떠한가? 이 곡은 미셀 비세글리아처럼 벨기에 출신이지만 이탈리아계인 노장 가수 로코 그라나타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을 미셀 비세글리아는 가수의 목소리와 상관 없이 멜로디에 본유(本有)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포착한 연주를 들려준다.
정서를 강조하는 트리오 연주
물론 그렇다고 미셀 비세글리아가 자신을 버리고 원전을 탐구하듯 연주한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에는 미셀 비세글리아만의 내면적인 서정이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내면적 서정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베르너 로쉐(베이스)와 마크 레한(드럼)가 아니었다면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으로 구체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미셀 비세글리아가 26세였던 1996년부터 함께 해온 이력답게-이번 앨범은 트리오의 세 번째 결과물이다- 두 연주자는 미셀 비세글리아의 피아니즘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해준다. 실제 베르너 로쉐의 베이스는 확연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미셀 비세글리아의 오른손이 만들어 내는 멜로디에 내재된 달콤한 우울에 방점을 찍듯이 가장 기본적인 음으로 시정을 확장시키고 있으며 마크 레한은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비스킷처럼 바삭거리는 브러시로 멜로디를 감싸는 청량한 공간감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이 트리오의 연주는 연주자 개개인의 존재감보다 세 연주자의 합이 만들어 낸 정서를 먼저 느끼게 한다. 예로 “Out To Sea”의 경우 매끄럽고 영롱한 질감의 피아노, 깊이 있는 베이스, 차분한 드럼 자체보다 세 악기가 모여 만들어 낸 이미지, 지상의 조명이나 달빛으로 인해 푸르게 빛나는 밤을 상상하게 한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미셀 비세글리아가 국내 재즈 애호가들의 마음을 매혹하리라 보는 이유이다.
키스 자렛의 흔적을 발산하다
한편 미셀 비세글리아는 분명 유럽인 특유의 감성을 발산하는 연주자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재즈의 전통 바깥에 있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스탠더드 곡“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와 찰리 파커의“Blues For Alice”를 연주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곡을 통해 그는 자신의 매력,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그는 결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장식적 연주에 빠지지 않는다. 여전히 멜로디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경제적인 음의 선택으로 간결하게 테마를 발전시키는 연주를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블루스는 점성(粘性)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셀 비세글리아가 재즈의 전통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려 한다는 사실은 그의 연주에서 발견되는 선배 연주자들의 영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그는 빌 에반스, 레니 트리스타노, 그리고 키스 자렛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연주자로 언급해왔다.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연주를 통해 표현해왔다. 그런데 이번 앨범의 경우 키스 자렛의 영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004년 무렵 함께했었던 듀이 레드맨을 추억하고 있는 “Side Square”와 이어 등장하는 “The Traveller”가 특히 그러한데 이 두 곡을 듣다 보면 예민한 감상자라면 미셀 비세글리아가 멜로디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연주 방식이 쾰른 콘서트 시절의 키스 자렛을 닮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미셀 비세글리아를 그가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트리오 캐틀야(Cattleya)-이 트리오는 프랑스의 세계적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음악으로 표현해오고 있다-를 통해 먼저 알았다. 그리고 단번에 그의 연주에 반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담은 앨범이 국내에 라이선스화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그는 무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1997년과 1999년 벨기에의 권위 있는 음악상인 ZAMU 어워드에서 올해의 연주자상을 받았을 정도로 자국에서는 유명인이다.) 하지만 이 생소함에서 모험심을 자극 받아 이번 앨범 <Inner You>를 듣게 된다면 분명 새로 발견한 보물 같은 존재로 그와 그의 음악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