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4일 일요일 저녁이었다. 무대에서는 한참 닐스 란드그렌 펑크 유닛의 흥겨운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는 공연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는 공연 관계자들과 다음 무대에 설 자비눌 신디케이트의 멤버들이 약간의 긴장 속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조 자비눌 신디케이트의 투어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조용히 대기실에 머물고 있었던 조 자비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재즈 관련 글을 쓴다니까 비공개로 해달라는 조건으로. (그래서 지난 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후기에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조 자비눌이 암에 걸린 상태이며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 자비눌은 자신의 병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올 9월 11일 화요일 오전, 조 자비눌은 결국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한 빌헬리미나 병원에서 7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내겐 그의 음악을 정리하는 글을 써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조 자비눌을 이야기 하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제일 먼저 그가 이끌었던 웨더 리포트를 제일 먼저 언급하곤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하면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며 퓨전 재즈의 탄생을 이끌었던 것을 떠 올린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조 자비눌이 얼마나 재즈사에 뛰어난 흔적을 남겼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실제 웨더 리포트가 어떤 그룹이었던가? <Heavy Weather>(Columbia 1971), <Black Market>(Columbia 1976) 등의 앨범을 통해 마일스 데이비스에서 시작한 퓨전 재즈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그룹이 아니던가? 물론 그룹에는 웨인 쇼터라는 걸출한 색소폰 연주자와 자코 파스토리우스, 미로슬라브 비투스 같은 뛰어난 베이스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룹의 특징이었던 탄탄한 그루브와 정교한 구조, 그리고 재즈, 록의 분위기에 살짝 드러났었던 민속적인 색채는 모두 그에게서 시작되어 정착된 것이었다. 한편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는 어땠는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명작 <In A Silent Way>(Columbia 1969)의 타이틀 곡과 이어졌던 명작 <Bitches Brew>(Columbia 1969)의 첫 곡 “Paraoh’s Dance”를 작곡하며 마일스 데이비스가 퓨전 재즈를 만들 때 오른팔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분명 이런 조 자비눌의 활동은 그의 음악 인생에 있어 가장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하지만 이 주요부분 앞뒤로 채워 넣어야 할 중요한 부분들이 더 있다. 먼저 그는 미국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사실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인이 아닌 외국의 연주자, 그것도 백인 연주자가 미국에서 재즈 연주자로 성공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 자비눌이 1958년 버클리 음대의 장학생으로 대서양을 건너가자 마자 곧바로 메이너드 퍼거슨 밴드의 피아노 연주자로 자리잡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즉, 그만큼 그의 피아노 연주가 뛰어났다는 것. 실제 메이너드 퍼거슨 밴드에 이어 그는 보컬 다이나 워싱턴의 피아노 반주자로 약 2년간 활동했다.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아들레이의 눈에 들어 캐논볼 아들레이 퀸텟에서 9년간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퀸텟에 머물면서 그는 백인이 만든 곡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흑인의 그루브 감각을 살린 “Mercy Mercy Mercy”같은 커다란 히트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렉트릭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캐논볼 아들레이의 소울 사운드에 전자적인 색채를 가미하기에 이르렀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편 <This I This>(Columbia 1985)를 끝으로 웨더 리포트 활동을 마친 후 그는 자신의 이름 혹은 자비눌 신디케이트라는 그룹명으로 웨더 리포트 말기 시절부터 조금씩 드러내곤 했었던 아프리카 등의 토속적인 리듬과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토속적인 사운드를 세계인 모두가 즐기는 보편적 것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이처럼 그가 이국적인 리듬과 분위기를 탐구하게 된 것은 물론 새로운 질감의 사운드를 찾고자 했던 그의 욕구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미국인이 아닌 유럽인이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즉,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유럽의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년에 미국이 아닌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며 자비눌 신디케이트를 이끌었던 것도 고향 이전에 유럽의 열린 문화적 환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조 자비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그의 음악은 계속 남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재즈 애호가들에겐 자비눌 신디케이트의 공연으로 특별히 오래 더 기억될 것이다. 자비눌 신디케이트의 <Vienna Nights: Live at Joe Zawinul’s Birdland>(ESC 2005)를 들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