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드러냄을 통한 음악적 개성의 획득
재즈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스타일리스트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루이 암스트롱, 찰리 파커, 엘라 핏제랄드,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등 재즈사를 빛낸 인물들을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는 말이죠. 이 스타일리스트란 재즈 가운데서 타에 모범이 될만한 자신만의 개성, 그래서 눈을 감고 들어도 아! 이것은 누구누구구나 라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색채를 제시한 인물을 의미합니다. 실제 재즈사는 이런 스타일리스트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아무리 뛰어난 보컬 실력, 연주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나만의 신선한 매력은 이것이다! 라고 명확히 제시할 수 없다면 그 보컬이나 연주자는 오래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자신만의 스타일의 필요성은 재즈가 갈수록 세분화, 다양화된 현재에 이를수록 더 강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제 “노래 잘 한다”, “연주 잘 한다”는 찬사는 그저 단순히 스캣을 잘 한다거나 빠른 속주를 잘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기교적인 것을 넘어 음악 전체를 관통하며 감상자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아우라(Aura)가 있어야 이러한 찬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재즈 연주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웅산의 경우는 어떨까요? 저는 이번 새로운 앨범을 통해서 그녀가 노래하는 가수에서 자신만의 음악적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진행시키는 스타일리스트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이번 앨범을 듣다 보면 그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그동안 그녀가 새로우면서도 자신만의 색이 담긴 사운드를 찾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의 이전 앨범들을 감상한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런 제 견해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 그녀의 첫 앨범 <Love Letter>(EMI 2003)은 그동안 공연을 통해서 알려졌던 웅산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폭넓은 대중들에게 알리는 성격이 강했던 앨범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즈 보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려 했기에 앨범은 스탠더드 곡들을 중심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재즈 가수 웅산의 이미지는 견고하게 인식되었지만 그녀의 장점은 완벽하게 드러나지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아! 그녀의 매력, 장점이 무엇이냐구요? 블루스입니다. 사실 그녀는 블루스를 노래할 때 훨씬 더 매력적입니다. 그것을 바로 우리는 그녀의 두 번째 앨범 <The Blues>(EMI 2005)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타가 중심이 된 강력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끈끈하고 육감적으로 소리지르며 노래하는 웅산의 모습은 정말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아! 웅산의 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첫 앨범의 다소곳함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노래들이었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웅산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두 번째 앨범을 들어보라 권하곤 합니다.
2.
하지만 그렇게 감추어졌던 본색을 과감하게 드러낸 후 그녀는 많은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더 깊게 생각해보면 두 번째 앨범에서 그녀가 들려준 블루스는 분명 뛰어나고 멋진 것이었지만 온전하게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블루스라는 틀 안에서 자유로이 노래할 줄 아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었지 재즈, 블루스 등의 기존 틀을 넘어 웅산만의 무엇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새 앨범에서 그녀는 블루스적 감각이 뛰어난 보컬로서의 능력을 그래도 유지하면서 개성적인 그녀만의 음악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실제 이번 앨범을 들으면 무엇보다 지난 앨범보다 힘을 빼고 노래하면서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웅산의 모습이 먼저 귀에 들어옵니다. 실제 저는 첫 곡 “파란새벽”을 시작으로 “미워하고 그리워하며”와 “지운다…(사랑이 너를 놓아준다)”를 거쳐 마지막 곡 “All Night Long”까지 들으면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정서가 너무나도 애절하고 슬펐기 때문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저절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쓰디 쓴 사랑의 기억을 반추하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이번 앨범에서 웅산은 남자를 확 휘어잡을 것 같았던 지난 앨범에서의 열정적이고 육감적인 모습을 버리고 성숙한 여인, 사랑의 아픔을 한 번 겪고 새로운 삶의 시기를 시작한 여인의 모습으로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를 단순히 노래의 분위기변화로만 이해한다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장르를, 형식을 노래하던 그녀가 이번 앨범에서는 자기 자신을 노래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죠. 특히 수록된 외국의 스탠더드 곡들 제외하고 거의 전곡을 그녀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슬프고 쓸쓸한 가사 그리고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차분한 사운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내면적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 물론 블루스를 노래하는 웅산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I Sing The Blues”같은 곡을 비롯하여 여러 곡에서 블루지한 그녀의 창법은 여전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이번 앨범에 담긴 웅산의 새로움은 과거를 무시한 단순한 변화라기 보다는 과거를 아우르는 확장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겠네요.
3.
아무튼 보다 더 정서적으로 노래하다 보니 음악적 형식에서도 여러 개성적인 면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번 앨범의 장르적 특성에 의문을 제기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최우준의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와 성기문의 몽롱한 키보드가 이끄는 이번 앨범의 사운드는 장르적으로 순수하게 재즈도 아니고 순수하게 블루스도 아닌, 그래서 때로는 포크적이기도 하고 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위기 좋은 팝에 머무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앨범의 사운드가 전통적인 재즈, 블루스와는 다소 다른 색을 띠게 된 것은 물론 보다 더 폭 넓은 감상자층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 요즈음 상당수의 재즈 앨범들이 힘을 빼고 색소폰, 트럼펫의 끈끈함보다는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의 담백함이 더 강조된 사운드를 지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앨범의 사운드 역시 이런 대중 지향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은 그 동안 재즈를, 블루스를 어렵게 생각하고, 그래서 이 음악을 듣는 여러분을 좀 외롭게 만들었던 주변 친구들로부터 “좋은데…같이 듣자”라는 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앨범의 사운드가 대중적이라고 웅산이 대중적 성공 자체에 목말라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물론 음악을 하고 그래서 앨범을 발표하는 모든 연주자, 보컬들은 자신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것을 꿈꾸지요. 하지만 자신의 음악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앨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모호성과 그 안에 내재된 대중적 측면을 결코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번 조용히 앨범을 차근차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웅산의 정서가 반영된 그녀만의 음악이다 라고 정의 내리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 이번 앨범에 담긴 몇 곡의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유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Angel Eyes”같은 경우는 전통적인 스탠더드의 면모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웅산의 다른 여러 자작곡들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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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번 앨범에서 웅산은 자신의 자작곡이건 널리 알려진 스탠더드 곡이건 모두 마치 지난 두 번째 앨범 이후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듯 그녀의 내면을 투영해 노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면서 음악적 개성을 획득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녀를 단순한 재즈 보컬을 넘어선 스타일리스트로 이해해도 괜찮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보다 더 개인적인 음악을 들려주는데 그 정서적 친근함은 이전 두 앨범보다 이번 앨범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감상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운드에 담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번 앨범들보다 이번 앨범이 더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지금 앨범을 감상하고 계신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P.S: 보통의 라이너 노트라 하면 다소 건조한 문체의 글이 일반적인데 저는 그렇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운다…(사랑이 너를 놓아준다)”때문이었습니다. 이 곡의 눈물이 당장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애잔하고 아쉬운 정서가 저를 감상적이게 만들었네요. 어쩌면 이렇게 이번 앨범은 감상적(感傷的)으로 감상(鑑賞)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