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경험으로 삶을 위로하는 노래
재즈 보컬의 특징과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마음을 울리는 흑인 특유의 끈끈함, 화려한 스캣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재즈 보컬의 참 맛은 이러한 흑인적인 기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즈 자체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다양한 변화와 확장을 거듭해왔듯이 재즈 보컬 역시 여러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특히 현재 재즈 보컬은 이제 막 재즈를 듣기 시작한 감상자라면 원래 백인 보컬이 정통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백인 일색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객관적으로 그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재즈 보컬계의 동향을 보면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 흐름은 재즈 보컬의 외관을 확 바꿀 정도로 야심 찬 것은 아니다. 대신 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그만큼 자유로이 감성을 드러내기를 의도하는 듯하다. 그리고 기존 흑인이 되었건 백인이 되었건 간에 대부분의 보컬들이 기존 스탠더드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과 달리 이 새로운 보컬들은 직접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경향을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20대 초반의 어린 보컬들이 이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재즈보다는 여타 장르의 음악의 영향을 먼저 받았기에 기존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교통사고로 음악을 시작하다
올 해 우리 나이로 23세(1985년생)인 미국 출신의 멜로디 가르도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젊은 감성을 표현하는 보컬이다. 그녀는 재즈보다 인디 록, 힙합에 어울리는 세대이고 또 이러한 팝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재즈는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음악의 일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애호가라 할 정도로 음악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곡을 만들고 노래를 하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16세 때 아르바이트로 피아노 바에서 연주를 했다는 사실에서면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음을 생각하게 되지만 손님의 취향보다 자신이 하고픈 곡들을 되는대로 연주했었다는 것을 보면 직업적으로 노래를 하거나 연주하겠다는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가 곡을 쓰고 노래를 하게 된 것은 다른 어느 경우보다 운명적이었다.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법규를 어긴 지프 차량과 충돌하여 골반과 척추의 골절부터 여러 신경의 손상까지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머리부분을 크게 다쳐 아침에 한 일을 저녁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장기간 병원 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의사가 그녀의 기억력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뮤직 테라피를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멜로디 가르도는 의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이 음악 치료법을 활용했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침대에 누워 곡을 쓰고 휴대용 멀티트랙 녹음기로 그 곡들을 노래하여 회복 후 <Some Lessons>라는 타이틀의 EP로 발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형식과 장르를 떠난 깊이 있는 정서
이처럼 음악적 계기보다는 삶의 위태로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만큼 멜로디 가르도의 음악은 장르 자체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 감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사운드를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음악에서 추출해 새로이 조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앨범을 듣다 보면 재즈를 중심으로 블루스, 포크, 팝 등의 요소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이들 요소가 정교하게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크인 듯하다가도 블루스인 듯하고 또 블루스 인듯하다가도 이내 재즈적인 느낌을 주곤 한다. 따라서 그녀의 음악은 넓게는 재즈로 포함되지만 그 재즈를 구성하고 있는 세세한 요소에 관심을 두다 보면 정작 그녀의 음악이 주는 진득한 깊이를 맛보지 못할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멜로디 가르도의 음악과 노래에서 재즈 보컬의 형식적인 면을 발견하기 보다 노래 자체가 주는 맛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놀란 것은 23세-앨범 발매 당시엔 22세인 여성의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정서였다. 세상의 이런저런 고통, 흔히 말하는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중년 여인의 정서를 닮았다. 하긴 “근심 어린 마음”이라는 앨범 타이틀부터가 20세 초반의 여성의 첫 앨범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기한 교통사고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깊은 정서적 울림은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결이 있는 벨벳의 느낌을 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천성적으로 블루스의 느낌을 강하게 담고 있다. 특히 블루스를 노래할 때의 빌리 할리데이를 많이 연상시킨다. 이를 위해서는 “All That I Need Is Love”를 들어보기 바란다. 클라리넷을 제외한다면 형식상으로는 분명 포크에 가까운 사운드지만 그녀의 보컬에 의해 곡 자체가 블루스적인 곡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우울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노래
블루스적인 끈끈함으로 위태로운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영감을 받은 곡들을 노래한다고 해서 멜로디 가르도의 노래와 사운드가 어둡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움보다는 밤, 그것도 부드럽고 은밀한 밤을 연상시키는 사운드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노래들은 삶의 괴로움을 위로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고통 자체를 노래하기 보다 그것에 대한 인내, 숙명적 받아들임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앨범의 나이를 초월한 듯한 깊은 정서는 어린 나이에 큰 고통의 시기를 겪어보고 나니 사실 그것은 별 것 아니었다는 식의 성숙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연, 실패, 외로움 등 현재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어두운 정서로 괴로워하는 감상자라면 멜로디 가르도의 노래가 좋은 위안을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만든 노래로 타인이 겪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셈이다. 특히 EP의 타이틀 곡이기도 했던 곡으로 병원에서 쓴 “Some Lessons”의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는 고독한 현대인을 위한 헌사라 할만한 곡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멜로디 가르도의 노래는 장르적 경험보다는 개인적 삶의 경험이 앞선다. 그렇기에 장르적으로 다소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르적 혼란은 어디까지나 음악을 정리 분석하는 평자들의 몫일 뿐이다. 장르보다 순수한 자신의 감성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은 오히려 보다 폭 넓은 감상자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매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음악을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편하게 듣는 감상자들이라면 분명 멜로디 가르도의 노래에서 평안을 느끼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