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즈 보컬 하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엘라 핏제랄드, 사라 본, 빌리 할리데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공리(公理)가 되었다. 그리고 이 3대 디바의 전설은 재즈 보컬은 흑인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지금도 카산드라 윌슨, 디 디 브리지워터, 다이안 리브스 같은 흑인 보컬들이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백인 보컬의 시대, 아니 적어도 피부색은 이제 더 이상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나의 이런 발언이 재즈 애호가들에게는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현재 우리가 좋아하는 재즈 보컬들을 생각해 보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노라 존스는 차치하더라도 스테이시 켄트, 제인 몬하이트, 실예 네가르, 로라 피지, 파트리시아 바버, 그리고 다이아나 크롤까지 백인 보컬들이 주를 이루지 않던가? 게다가 이 가운데 다이아나 크롤은 현재 재즈 보컬 하면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이 시대의 디바로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물론 과거에도 백인 보컬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보다 팝적인 경향을 지녔었고 음악 이전에 외모로 먼저 인정을 받곤 했었다. 이들을 지칭하는 실제 블론드 보컬이라는 용어는 이런 외모 우선형 보컬을 다소 폄하하려는 의미를 그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다이아나 크롤은 이러한 블론드 보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물론 그녀 역시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그래서 활동 초기에는 그 외모가 주목을 받는데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창법, 음악을 발전시켜 노래와 음악 모두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과 개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 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러 제작자들과 감상자들의 관심을 백인 여성 보컬들에게 쏠리게 해 지금의 백인 여성 보컬 전성 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2.
캐나다 출신으로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자이자 방대한 재즈 앨범을 지니고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재즈계에 입문한 이후 다이아나 크롤이 자신의 이름으로 녹음한 앨범은 1993년 Just In Time 레이블에서 녹음한 <Steepin’ Out>을 시작으로 지난 해의 <From This Moments On>(Verve 2006)까지 총 열 장이다. 그리고 이 열 장의 앨범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어냈다. 예로 첫 앨범은 빌보드 재즈 차트 3위에 올랐으며 이런 성공으로 인해 그녀는 명 제작자 토미 리푸마의 눈에 띄어 GRP레이블에서 두 번째 앨범 <Only Trust Your Heart>(GRP 1995)를 녹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앨범을 통해 그녀는 일약 세계적인 재즈 보컬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한편 다이아나 크롤이 남다른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매력적인 외모와 함께) 그녀의 포근하고 편안한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즉, 토미 리푸마라는 제작자가 그녀 곁에 있었지만 그 이전에 직접 자신의 목소리 창법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세 번째 앨범 <All For You>(Impulse! 199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공개적으로 역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곤 했던 냇 킹 콜 트리오에 대한 경의를 밝히며 냇 킹 콜 트리오가 완성한 피아노-기타-베이스 트리오 편성으로 연주했다. 그래서 빌보드 재즈 차트에 70주간이나 머무르며 최초로 그래미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앨범인 <Love Scenes>(Impulse! 1997) 또한 피아노-기타-베이스 트리오로 녹음했다.
이렇게 전통을 존중하고 이를 계승하려는 의지가 담긴 그녀의 노래들은 갈수록 평단과 대중의 지지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이것은 앨범 <When I Look In Your Eyes>(GRP 1999)과 <The Look Of Love>(Verve 2001)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먼저 <When I Look In Your Eyes>는 일 년 내내 빌보드 재즈 차트 1위에 머무는 기염을 토했으며 그녀에게 그래미상 재즈 보컬 부분을 수상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올 해의 앨범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어서 <The Look Of Love>는 재즈 부분을 넘어 보다 폭넓은 빌보드 팝 차트 10위권에 오르며 다이아나 크롤을 견고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보컬로 만들었다.
이렇게 커다란 성공을 이루자 그녀는 파리에서의 공연 실황을 담은 <Live In Paris>(Verve 2002) 이후 자신만의 내면적 소리를 담은 앨범을 녹음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엔 엘비스 코스텔로와의 결혼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남편과 함께 그녀는 스탠더드가 아닌 자작곡이 중심이 된 <The Girl In The Other Room>(Verve 2004)를 녹음하며 피아노 연주자, 재즈 보컬을 넘어 곡을 만드는 작곡가, 앨범을 기획하고 전체 사운드의 방향을 결정하는 제작자로서의 역량을 새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앨범이었던 <Christmas Song>(Verve 2005)에 이어 임신의 상태에서 녹음한 앨범 <From This Moments On>(Verve 2006)에서 다시 스탠더드를 부르며 가정이 주는 새로운 행복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열 장의 앨범을 살펴보면 전통적이라는 점, 그녀의 목소리가 포근하고 부드럽다는 점은 그녀만의 음악적 특징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으면서 사운드나 음악 스타일은 계속 변화를 거듭해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단 편성에서 보면 냇 킹 콜 류의 피아노 트리오에서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그리고 빅 밴드까지 다양한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스타일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스윙, 블루스, 비밥, 그리고 보사노바 등 다양한 양식이 사용되었다. 그녀의 음악이 매번 익숙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신선함으로 다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외형적 변화 때문이다.
3.
이번 다이아나 크롤의 베스트 앨범은 이러한 그녀의 활동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앨범 활동을 지켜본 감상자라면 이번 베스트 앨범이 살짝 의외로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실제 2000년대 들어 그녀가 1년에 한 장씩 새 앨범을 발표해 온 것을 생각하면 2007년 9월은 베스트 앨범이 아니라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어야 할 때다. 그럼에도 이렇게 새 앨범 대신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게 된 것은 다이아나 크롤이 휴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알려졌다시피 그녀는 지난 해 앨범 <From This Moments On>을 발매한 직후인 12월, 쌍둥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약간의 휴식 후 곧바로 활발한 공연 활동에 들어갔다. 따라서 새로운 앨범을 녹음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다이아나 크롤은 이번 베스트 앨범이 평범한 베스트 앨범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여러 면에서 통상적인 베스트 앨범과는 다른 면이 발견된다.
그것은 먼저 앨범 선곡 방식이 발표한 여러 앨범에서 일정 비율로 몇 곡씩 선곡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부터 확인된다. 그녀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만큼 대중적 관점에서 선곡을 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녀 최대의 인기 앨범인 <When I Look In Your Eyes>에서 다섯 곡을 발췌하는 대신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이자 첫 번째 세계 발매 작이었던 <Only Trust Your Heart>에서는 한 곡도 선곡하지 않았다. (첫 앨범은 제작사가 다르기에 아예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곡된 곡들의 배열 역시 시간 순을 따르기 보다 곡들의 자연스러운 연결, 그로 인해 다이아나 크롤의 보컬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배열되었다. 그러므로 이 베스트 앨범은 다이아나 크롤의 음악을 연대기적 혹은 사료적으로 정리했다기 보다 앨범 자체의 음악적 완성도를 우선으로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하겠다.
하지만 베스트 앨범은 어디까지나 기존에 발표한 익숙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베스트 앨범은 그녀의 음악을 잘 모르는, 처음 접하는 감상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지만 이미 그녀의 노래와 음악을 잘 알고 그녀의 모든 앨범들을 소유한 감상자들에게는 사족(蛇足) 혹은 계륵(鷄肋)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아나 크롤도 이를 의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베스트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음에도 앨범에는 세 곡의 미발표 곡들을 앨범에 수록했다. <Look Of Love>앨범에 수록되었어야 했을 “You Go To My Head”와 “Only The Lonely” 그리고 <The Girl In The Other Room>에 수록되었어야 했을 “The Heart Of Saturday Night”이 바로 그 곡들이다. 이 곡들은 정규 앨범의 선곡과정에서 탈락된 노래들이지만 그렇다고 하자가 있는 곡들은 아니다. 아마 앨범의 전체 분위기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곡들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이 개별 곡들이 주는 음악적 감흥은 모자람이 없다.
한편 더 나아가 앨범은 DVD 타이틀을 보너스 형식으로 추가하고 있다. 뮤직 비디오와 공연 실황 영상을 종합한 DVD인데 이 역시 기존에 만나기 쉽지 않았던 영상이므로 많은 기존 감상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까 생각된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CD에 추가된 보너스 영상물의 수준을 넘어 정규 DVD에 가까운 9곡을 담고 있다는 점도 흥미를 자극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대중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베스트 앨범이기에 이 앨범 역시 정규 앨범 못지 않은 신선함과 만족을 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