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코닉 주니어 뉴 올리언즈를 연주하다
많은 사람들은 제이미 컬럼, 피터 신코티 같은 요즈음 인기를 얻고 있는 남성 재즈 보컬을 이야기할 때 그 선배로 해리 코닉 주니어를 언급하곤 한다. 그것은 해리 코닉 주니어가 10대 후반부터 재즈를 완숙하게 노래하여 인기를 얻었던, 그래서 지금의 20대 초반의 보컬들의 모범이 될만한 이력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해리 코닉 주니어의 다른 면을 거의 무시했을 때 성립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해리 코닉 주니어는 단순히 프랑크 시나트라에서 시작된 크루너(Crooner) 보컬의 계보를 잇는 남성 보컬로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다른 능력이란 다름아닌 작곡, 편곡, 빅 밴드의 리더,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일 지도 모르지만 해리 코닉 주니어의 이런 능력들은 보컬 실력을 능가한다. 사실 전 세계의 재즈 애호가들이 해리 코닉 주니어에 주목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보컬이 아니라 그의 편곡 능력 때문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영화 <When Harry Meet Sally>의 영화 음악을 담당하면서 그는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빅 밴드의 각 파트를 세심하게 고려한 편곡과 스윙시대에 기반을 둔 복고적 향취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숙미를 지녔다는 평도 바로 이런 편곡 및 빅 밴드 리딩 능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컬은 그 다음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해리 코닉 주니어 하면 보컬이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무래도 <When Harry Meet Sally>(Columbia 1989) 이후 계속 보컬 앨범을 녹음했으며 이런 면이 대중 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보컬을 전면에 내세운 앨범들은 몇 장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실 생각만큼의 큰 성공을 그에게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계속 보컬 앨범을 녹음했지만 이 앨범들 역시 그의 작, 편곡으로 채워져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와중에 새로운 20대 보컬들이 등장함에 따라 30대의 해리 코닉 주니어에 대한 세인의 관심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최근 해리 코닉 주니어는 그의 음악 인생에 상당히 큰 의미로 남을 앨범들을 시리즈로 녹음하고 있다. 그것은 2003년부터 시작된 <Connick On Piano> 시리즈 앨범이다. 이 시리즈 앨범은 타이틀이 의미하듯 노래를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자로서의 모습에 충실한 해리 코닉 주니어를 담고 있다. 이 시리즈 앨범은 지금까지 <Other Hours>(Marsalis Music 2003)과 <Occasion>(Marsalis Music 2005) 이렇게 두 장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제 막 세 번째 앨범이 2007년 1월에 선을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듣고 있는 <Chanson Du Vieux Carré>다.
<Connick On Piano> 시리즈에 속하는 앨범인 만큼 이번 앨범에서도 해리 코닉 주니어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심지에 앨범에 담긴 두 곡의 보컬 곡에서도 그는 마이크 앞에 다른 연주자들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전 <Connick On Piano> 시리즈의 두 앨범들에 비해 이번 앨범은 또 다른 변별력을 보여준다. 즉, 이전 앨범들이 퀄텟(<Other Hours>), 듀오(<Occasion>)편성으로 녹음되어 그동안 해리 코닉 주니어의 온전한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모습과 만나기 어려웠던 내면적 정서를 드러냈다면 이번 앨범은 피아노 연주력 외에 편곡과 빅 밴드 리딩 능력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능력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특히 그의 편곡 능력은 대단하다. 17인조 대형 빅 밴드를 위한 그의 편곡들은 어느 하나 과장된 부분이 없이 퀄텟이나 퀸텟 등의 일반적인 콤보 편성에 버금갈 정도로 유기적인 진행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Luscious”나 “I Still Get Jealous”같은 곡을 들어보기 바란다. 3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이 곡은 크게 솔로와 브라스 섹션으로 나뉜 가운데 세밀하게 조율되고 분류된 하위 세션의 교차 및 병행이 상당한 감상의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면모는 현대적인 믹싱 기법에 의해 보다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다지 큰 공간감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스피커의 좌우로 큰 파노라마를 그리며 형성된 브라스 섹션의 각 파트들이 화려하고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해리 코닉 주니어의 지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Connick On Piano>시리즈라고 하기에 이번 앨범은 지난 시리즈 앨범들 보다 확연하게 해리 코닉 주니어의 피아노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대신 트럼펫 연주자 르로이 존스나 트롬본 연주자 루시앙 바르바린 등 관악기 솔로 연주자들의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상기했다시피 소 편성이 아닌 빅 밴드 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편으로는 앨범이 뉴 올리언즈 재즈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뉴 올리언즈 재즈가 어떤 재즈던가? 행진 밴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래서 피아노가 중요하지 않았던 음악이 아니던가? 물론 뉴 올리언즈 재즈를 기반으로 해리 코닉 주니어만의 현대적 빅 밴드 감각이 가미되었기에 그의 감칠 맛 나는 피아노 연주가 몇몇 곡-특히 “New Orleans”같은-에서 간간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 해리 코닉 주니어의 가장 주된 역할은 빅 밴드의 리더다. 마치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편 섬세한 편곡과 그에 따른 밴드 각 파트의 유기적인 연주가 강점으로 드러난다는 것만이 이 앨범의 매력이 아니다. 이런 음악적 매력 외에 정서적 매력 또한 뛰어나다. 그것은 그 섬세한 편곡 사이사이를 흐르는 유쾌함의 정서, 익살의 정서다. 절대 긍정적인 의미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순간을 즐겼던 저 빅 밴드 시대를 그리게 해주는 이 넉넉한 정서는 혹시 해리 코닉 주니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아쉬워할 지도 모르는 몇 감상자들에게 큰 매혹으로 다가가리라 생각한다.
뉴 올리언즈 재즈를 화두로 삼았기에 당연히 이 앨범은 지난 태풍 카트리나로 피해를 입은 뉴 올리언즈의 현지 연주자들을 돕기 위한 의도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의 기획만큼은 태풍 카트리나가 뉴 올리언즈를 강타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즉, <Connick On Piano>시리즈가 시작했을 무렵 이미 해리 코닉 주니어에게는 이번 앨범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앨범이 단순히 뉴 올리언즈 재즈를 향수 어린 회상의 입장에서 복기(復碁)하지 않고 해리 코닉 주니어만의 개성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앨범이 지금까지 기획된 여러 뉴 올리언즈 돕기 프로젝트 앨범들 가운데 빛난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아무튼 이번 앨범은 그 동안 보컬에 가리워져 있었던 해리 코닉 주니어의 빅 밴드 음악이 지닌 매력을 모처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앨범으로 그의 앨범 이력에서 오래 기억될 앨범이 될 것이다.
PS: 아! 그래도 해리 코닉 주니어의 노래가 듣고 싶다고? 그렇다면 이 앨범과 함께 발매되는 <Oh, My Nola>(Columbia 2007)을 들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