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하고 편안한 윤선의 집에 초대 받다.
유난히 짧은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매번 같은 길을 걸어도 하루 하루 그 느낌이 다릅니다.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나뭇가지에 붙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불 때면 그들이 왠지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땅을 향하고, 깊은 침잠의 세계로 향하는 11월, 사람들은 가슴 한쪽이 횡 하니 비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는 누군가 필요하다! 라는 혼잣말을 하게 되지요. 그것은 꼭 지금 내 옆에 애인이 있느냐 없느냐 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는 말처럼 그것은 가을마다 우리를 사로잡는 존재 자체의 외로움이거든요. 사랑을 떠나 나와 무엇인가 정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을이 되면 더욱 필요해 집니다.
그런 가을 한 여인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얼굴도 예쁘지만 목소리는 더욱 예쁜 그녀. 그녀가 가을마다 찾아오는 지독한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나윤선. 때로는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애인으로서, 때로는 내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친구로서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합니다.
1 윤선의 집-편안한 집
사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녀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욱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듣자 하니 프랑스의 몇몇 재즈 평론가들은 그녀의 앨범이 아닌 다른 유명 여성 보컬들의 앨범을 리뷰 하면서 “나윤선의 목소리, 창법의 영향을 받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나윤선을 하나의 보컬의 전형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여성 보컬들을 평가할 정도로 그녀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평론가들의 평가와 대중적인 평가는 늘 같지는 않습니다. 나윤선의 음악도 사실 몇몇 감상자들은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것이 아닌가? 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기존 재즈가 주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소 늘 우리가 듣던 그런 노래를 들려주는가 싶다가도 쉽게 따라가기 힘든 독특한 세계로 흘러가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음악에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은 지난 해 크리스마스 공연에서도 어느정도 느낄 수 있었죠. 당시 공연 자체는 상당히 훌륭했지만 마냥 낭만적인 분위기만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다소 전위적이었던 공연은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만약 지난 해의 공연이 충격으로 남아 있는 분들이라면 오늘 공연도 혹시 어려운 것이 아닐까? 걱정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 윤선의 집-그녀의 과거가 담겨 있는 집
하지만 오늘 공연의 제목은 <윤선의 집>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그녀가 우리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다는 것이죠. 집이란 게 무엇이던가요? 하루 종일 밖에서 힘들고 지친 우리를 편안하게 감싸주는 곳이 아니던가요? 윤선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노래로 가득한 그 집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는데요. 이 집에서 그녀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녀만의 과거와 미래를 수줍은 듯 드러낼 것이라 하니 기대가 됩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나윤선의 현재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뒤로하고 우리에게 불현듯 나타난 이후 그녀는 기존의 미국적 재즈와는 다른 색을 지닌 자신만의 재즈로 우리를 사로잡지 않았던가요? 바로 색다른 그 개성에 매료된 나머지 우리는 그녀가 현재의 음악을 아주 오래된 과거부터 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라 막연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윤선 현재가 아주 특별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특별함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윤선의 음악이 매력적인 것은 특별한 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보편적인 감수성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녀의 재즈는 많은 분들이 잘 알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절래 흔들곤 하는 미국식 재즈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게 벗어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포크적, 클래식적, 그리고 우리 가요적인 면을 음악에 담아 내었습니다. 이것이 기존 재즈와는 다른 그녀만의 개성으로 승화되었고 또 그만큼 이 특별한 개성이 익숙한 보편성을 띄게 되면서 우리에게 다른 어느 재즈보다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로 오늘 윤선의 집에서 우리는 그녀만의 개성의 근간을 이루는 보편적인 면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편적인 면들은 바로 그녀가 노래로 이야기 해주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윤선의 집에서 우리가 듣게 될 곡들을 미리 밝히는 것은 여러분의 흥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어 정확하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우리에게 그녀가 재즈 가수 이전에 그저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또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던 풋풋한 20대 시절 즐겨 듣고 따라 불렀던 노래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현재 그녀의 음악과 연결되는 것이면서도 보다 보편적이고 싱그러운 젊음의 정서를 드러낼 것입니다. 아마 들으시면 그녀의 현재가 단지 어려운 음악 이론 수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그녀의 집에 놀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겁니다.
- 윤선의 집 – 그녀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집
한편 오늘 우리는 그녀의 가까운 미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앨범에 관련된 이야기들일 텐데요. 현재 그녀는 새로운 앨범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실 가장 최근 앨범인 <So I Am>이 지난 2004년에 발매되었었으니 시기적으로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어야 할 때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과정을 넘어 이번 앨범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와 늘 함께 하던 그룹이 아닌 다른 연주자와 함께 녹음할 예정이거든요. 분명 나윤선 그룹은 또 나윤선을 벗어나 그 자체만의 매력을 충분히 지녔습니다. 그러나 재즈가 언제나 새로운 만남, 그들과의 새로운 연주를 통해 발전해 왔음을 생각한다면 기존 그룹이 아닌 다른 연주자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묘한 긴장과 그만큼의 기대를 수반합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나윤선만의 새로운 무엇을 만날 수 있게 되겠죠.
이번 새로운 앨범은 네덜란드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죠? 올 초 트리오 몽마르트를 이끌고 내한하기도 했었던 닐스 란 도키와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나 닐스 란 도키의 곡이 아닌 다른 우리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 그리고 팝 음악, 우리 가요 등이 닐스 란 도키의 편곡으로 그녀에게 맞는 다른 곡으로 탈바꿈되어 앨범에 실릴 예정이라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새 앨범 역시 현재 그녀의 음악에서 다른 방향-보다 편안한 방향으로 흐르리라 예상됩니다. 바로 그 새 앨범에 들어갈 곡들을 오늘 처음 그녀는 우리에게 노래해 줄 예정이라 합니다.
한편 오늘 우리는 단순한 나윤선의 공연이 아닌 그녀의 집에 놀러 온 만큼 그녀는 몇 가지 소품성 영상들로 우리에게 그녀의 현재를 넘어 과거나 미래 같은 다른 차원에서의 그녀를 상상하게 해줄 것이라 합니다. 역시 기대되는 부분이죠.
며칠 입지도 않았는데 제 트렌치 코트가 날씨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을이 갈색으로 시들어 가는 시간, 무엇인가 따스하고 편안한 무엇을 찾는 와중에 이 윤선의 집에 들어오셨다면 아마 여러분은 앞으로 한 시간 30여분이 지난 후 다시 이 윤선의 집에서 나갈 때 가슴에 훈훈한 무엇을 담아 나간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허풍이 아닙니다. 저 낯선 청춘이 나윤선의 공연 리허설을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거든요. 자 그러면 윤선의 집에서 편히 쉬시다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