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우리를 감동시켰던 키스 자렛의 앨범 <Radiance>는 2002년 10월 일본의 오사카 공연 실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붙여진 <Radiance>라는 표제의 완성미를 위해 3일 뒤 가졌던 도쿄 콘서트에서 4곡을 뽑아 앨범을 마무리 했었다. 그래서 앨범 <Radiance>에 감동하면서도 키스 자렛 애호가들은 다 듣지 못한 도쿄 공연의 연주를 온전한 형태로 듣고 싶어했다. 이제 그 도쿄 공연 실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영상으로 말이다.
이번 DVD는 일본 비디오아트사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제작한 것이긴 하지만 ECM에서 처음 발매하는 키스 자렛의 영상물이다. 그만큼 음악적 내용이 뛰어나기에 ECM에서 직접 발매할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게다가 이 공연이 키스 자렛의 150번째 일본 공연이었다는 사실은 이 영상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한다. 그리고 실제 감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소 선정적인 표현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도쿄 공연의 내용은 음악적으로 오사카 공연을 담은 <Radiance>보다 더 훌륭하다. 비록 <Radiance> 앨범의 후반부 4곡이 다시 반복되고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연주들은 새로운 의미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에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공연은 침묵을 상징하는 흑백 화면으로 시작해 세피아 톤의 영상으로 공연을 진행하고 다시 흑백 화면의 침묵 속으로 돌아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약 두 시간 가량 진행되는데 11개의 챕터로 나뉘어졌지만 크게 두 개의 즉흥 솔로 연주와 앵콜 형식으로 공연의 후반을 장식하고 있는 세 곡의 스탠더드 연주로 구성되었다. 그 중 솔로 콘서트의 경우 지난 <Radiance>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솔로 콘서트와 달리 내부에 작은 휴지기를 두며 새로이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하나의 주제를 새로 시작하다가 이상한 듯 자렛이 천천히 생각하고 새로이 주제를 만들어 나가는 듯한 장면도 등장한다. 이것은 영상이 아니면 느끼기 힘든 것이다.
한편 귀로 듣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은 다른 차원의 감동을 이끌어 낸다. 음악만 감상하는 것은 키스 자렛이 만들어 낸 음악적 이미지를 따라 상상의 세계로 빠지는 즐거움이 있다면 이 영상은 그 외에 우리가 공연장에서 느끼곤 하는 연주자의 강한 존재감에서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느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도 키스 자렛의 인상은 여전히 찡그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음 하나하나에 온 힘을 다한 집중력으로 건반을 눌러나간다는 점, 연주의 흐름이 격한 감정으로 상승하면서 키스 자렛이 퍼포먼스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은 분명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느끼기 힘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온전한 음악 감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키스 자렛의 이런 모습들은 그가 어떻게 음악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나가는지, 특히나 이전 솔로 공연과 달리 이번 공연부터 새로이 시도했던 내적인 휴지기를 두고 연주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화면 구성은 피아노 솔로 공연인 만큼 단순하지만 끝까지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