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英美)의 유명 시(詩)들을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노래한 앨범
칼라 브루니 라는 이름은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적어도 국제 뉴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 프랑스의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아내, 그러니까 영부인이 칼라 브루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그녀에 관한 뉴스들은 대부분 그녀가 올 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결혼한 이후의 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영부인으로서의 칼라 브루니에 관련된 뉴스들은 대부분 그녀를 그다지 좋지 않은 모습으로 다루고 있다. 최근 뉴스만 해도 칼라 브루니를 ‘21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라 부르며 그녀가 자기 몸치장에만 신경 쓴다는 내용의 프랑스 텔레그라프지의 기사가 인터넷 뉴스로 올라와 있다.
이처럼 그녀와 관련된 가십성의 부정적인 뉴스들은 아무래도 그녀가 과거 세계적인 탑 모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19세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한 이래 크리스티앙 디오르, 파코 라반, 소냐 리키엘, 칼 라저펠트, 입 생 로랑, 베르사체 등의 고가 브랜드의 얼굴로 활동하며 1997년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모델 20명의 한 명으로 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즉, 그만큼 그녀의 외적인 매력이 상당했다는 것인데 그래서 차분하고 정숙한 이미지의 영부인으로서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칼라 브루니의 정신적 깊이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녀가 모델 활동을 그만두고 노래를 해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라 브루니는 1997년 정상의 자리에서 모델 활동을 그만 둔 이후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 활동은 이런저런 유명인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단발적 흥행을 노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모델 활동을 그만 두자마자 곧바로 앨범을 녹음하는 대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모델에서의 삶을 가수로서의 삶으로 바꾸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유명 가수 줄리엥 클레르(Julien Clerc)의 2000년도 앨범 <Si j’étais elle 내가 만약 그녀였다면>에 작사가로 참여한 후 2002년에서야 첫 앨범 <Quelqu’un M’a Dit 누가 내게 말하기를>를 발매할 수 있었다. 이 첫 앨범은 프랑스어 권 국가를 중심으로 200만장 이상 판매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국내에서도 은근한 반향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 성공은 슈퍼 모델 출신의 칼라 브루니가 노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음악 때문이었다. 앨범에 담긴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한 차분하고 포근한 사운드와 수줍게 속삭이는 듯한 스모키 보이스는 그녀가 화려하고 세련된 슈퍼 모델의 삶을 살았던 여성임을 잊게 해줄 정도로 훌륭했다. 게다가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고 직접 작사, 작곡을 했다는 사실은 감상자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만의 음악적 속도를 유지했다. 바쁘디 바쁜 모델 세계와는 다른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그녀의 두 번째 앨범 <No Promises>는 은 첫 앨범을 발매하고 5년이 흐른 뒤인 지난 2007년에 발매되었다.
이번 두 번째 앨범을 통해서 칼라 브루니는 첫 앨범에서 보여준 반짝거리는 음악적 재능과 이에 기반한 내면을 소박하게 담아낸 음악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밝힌다. 그러면서 음악적으로 지난 앨범보다 한 단계 깊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녀가 프랑스어 권 국가를 중심으로 지명도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번 앨범이 영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라 브루니가 프랑스어 권을 넘어 영어권 국가, 나아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자 이 앨범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오히려 이번 앨범에서 영어로 노래하게 된 것은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누가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앨범에 담긴 영어 가사들은 모두 영미(英美)의 유명 시(詩)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각 곡의 작사가들을 살펴보면 도로시 파커를 시작으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월터 드 라 매어, 에밀리 디킨슨, 위스턴 휴그 오든, 크리스티나 로제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 사이에 활동했던 유명 시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유명 시인들의 시들은 앨범 표지에 담긴 모델 시절을 잊지 않은 듯 다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시집으로 보이는) 책을 읽고 있는 칼라 브루니의 모습처럼 평소 그녀가 즐겨 읽었던 시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은 각 곡의 멜로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유명 시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의 경우 대부분 텍스트의 의미와 그 자체의 내적 리듬 등 문학성을 살린다는 의도가 오히려 멜로디와 가사가 어색하게 결합되는 결과를 낳곤 했다. 하지만 칼라 브루니가 직접 쓴 각 곡들은 시들과 너무나도 완벽한 하나됨을 이루고 있다. 여러 차례 그 시를 읽고 작가의 의도, 정서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시로 육화(肉化)한 후에 이에 맞추어 멜로디를 썼을 때나 가능한 조화다. 그래서 앨범에 담긴 그녀의 노래는 시인의 정서보다 그 시에 대한 칼라 브루니 자신의 정서가 우선적으로 드러난다. 예로 예이츠의 시를 노래한 첫 곡 “Those Dancing Days Are Gone”는 다소 회한이 느껴지는 시의 정서 대신 좋은 시절의 지나감을 받아들이는 낙관적인 정서로 노래한 반면 역시 예이츠의 시를 노래한 “Before The World Was Made”에서는 시의 정서를 살려 다소 허무함이 느껴지는 애잔한 정서로 노래한 것을 보면 그녀가 무엇보다 자신의 느낌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칼라 브루니의 노래를 들으며 시로 이루어진 가사 자체를 그대로 음미하기란 영어권 밖에 위치한 한국의 감상자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일일이 가사를 뚝딱거리는 영어 실력으로 따로 해석해서 이해해야 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시를 가사로 한 이번 앨범을 버겁게 생각할 감상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사와 상관 없이 사운드만으로도 이 앨범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감상할만하다. 그리고 또 사운드만으로도 시로 이루어진 가사의 의미, 정확하게는 시에 대한 칼라 브루니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난 첫 앨범에 이어 이번 앨범에서도 그녀의 음악적 파트너로 참여한 전 애인인 루이 베르티냑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는 앨범의 제작을 담당하고 기타를 연주자로 반주를 직접 이끌며 한가한 오후의 무료함과 그 무위(無爲)의 상태가 주는 안락한 행복이 공존하는 듯한 자신의 전 애인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담백하고 정갈한 포크 사운드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칼라 브루니가 첫 앨범에 이어 이번 두 번째 앨범에서 자신의 내면적 깊이를 더욱 확연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가십성 뉴스를 통해 보여진 칼라 브루니에만 익숙해진 감상자라면 이번 앨범을 통해 칼라 브루니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 프랑스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저 먼 곳의 인물이 아닌 바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휴식 같은 위안을 주는 친구,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친구로 자리잡게 되리라 생각한다. 프랑스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예쁜 외모보다 그녀의 음악적 내면에 반했던 것이 아닐까?
PS: 한국에는 이제서야 두 번째 앨범이 소개되지만 현재 그녀는 세 번째 앨범의 발매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앨범 타이틀이 <Comme si de rien n’était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이라고 한다. 자신만의 속도와 여유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부인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타이틀인데 그래서 <No Promises>를 듣고 있는 지금 세 번째 앨범도 빨리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