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his Moment On – Diana Krall (Verve 2006)

삶의 행복한 시기를 기록한 앨범

  1. 앨범은 한 연주자의 삶을 반영한다

재즈는 순간의 음악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정해진 틀이 있더라도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는 바로 그 순간의 감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순간의 음악으로서의 재즈가 가장 큰 매력을 발휘했을 때는 그래도 1950,60년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때는 연주자들끼리 모여서 “자 한번 해볼까?”해서 연주를 하면 한 장의 앨범이 되었죠. 말하자면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앨범도 현장성이 강조된 라이브 앨범처럼 녹음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연주자가 한 해 동안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재즈를 바라보면 순간의 음악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수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연주자들이 단지 자신이 연주하는 흥겨운 한 때를 기록하기 보다는 앨범에 무엇인가 자신이 드러내고픈 의미를 부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보다는 한 해에 한 장정도의 앨범을 녹음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의미를 앨범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반의 준비를 통해 연주자의 순간적 결합을 넘어 하나의 음악적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이제 앨범을 녹음한다는 것은 순간의 기록이 아니라 이전 앨범 이후 한 연주자의 한 시기의 삶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이아나 크롤의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그녀는 재즈의 전통적인 측면을 잘 유지, 계승하고 있는 인물에 속합니다. 특히 냇 킹콜이 새운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보컬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면서 다른 누구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노래를 계속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계속 스탠더드만 노래하기에 그 스타일이 뻔하다 싶은 그녀의 음악이지만 앨범마다 나름대로 변화, 변신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중 지난 2004년에 발표했던 앨범 <The Girl In The Other Room>은 그녀의 앨범 목록 가운데 가장 빛나는, 독특한 앨범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이전 그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스탠더드 곡집을 덥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 엘비스 코스텔로의 자작곡 중심으로 앨범을 꾸몄던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앨범은 말 그대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방에 살고 있던 그녀”를 새로이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바로 그녀의 삶이 결혼이라는 큰 이벤트를 거쳤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사랑과 가정이라는 삶의 변화를 겪으며 음악도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1. 행복한 시기에 녹음된 새 앨범

이런 그녀가 다시 새로운 앨범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얼핏 보니 지극히 평범한 듯합니다. 스탠더드 곡들을 다시 노래하는 것을 보니 마치 <The Girl In The Other Room>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입니다. 하긴 다이아나 크롤의 음악이 지닌 매력이 익숙한 즐거움 즉, 다양한 재즈의 영역 가운데 대중적인 측면을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평범함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만약 변화 그 자체만을 원했다면 <The Girl In The Other Room>에 이은 이번 앨범은 쉽게, 편하게 듣기 어려운 파격의 방향으로 나아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이아나 크롤은 지난 앨범을 잊기라도 한 듯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한동안 보지 않았던 스탠더드 곡집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듯한 음악에 지난 앨범 이후 그녀의 삶을 담아내었습니다. 그 삶의 기록이 바로 이 앨범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삶의 변화란 무엇일까요? 바로 “행복”입니다. 그녀는 실제 이번 앨범이 그녀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와 일치하며 이것은 음악에 명백히 드러난다. 정말 결혼과 가정에 대해 지금 느끼고 미래에도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기쁨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출산의 기쁨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임신 중에 이 앨범을 녹음한 것이죠.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다이아나 크롤이 말하는 행복이란 평범한 우리네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 가정이 별 탈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앨범의 평범함, 익숙함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익숙함, 편안함이야말로 그다지 큰 고통 없이 삶이 흘러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앨범에 담긴 11곡의 스탠더드 곡들은 다른 어느 앨범 이상으로 모두 흥겨움, 낭만, 편안함, 따스함 등 지극히 긍정적인 정서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말 그래도 행복의 다양한 표현들인 셈이죠.

  1. 커다란 행복과 작은 기쁨을 아우르는 사운드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도 나름대로 다이아나 크롤이 음악적으로 새로움을 부여하려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수로서의 가능한 경우의 음악적 시도는 다 해보았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앨범에서 쉽게 그 변화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변화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클레이튼 해밀튼 오케스트라의 기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클레이튼 해밀튼 오케스트라는 드럼 연주자 제프 해밀튼, 알토 색소폰 연주자 제프 클레이튼, 그리고 베이스 연주자 존 클레이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이끌고 있는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리고 이 오케스트라는 현존 재즈 빅밴드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빅 밴드 음악을 잘 표현하는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런 클레이튼 해밀튼 오케스트라를 다이아나 크롤이 기용한 것은 재즈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바로 스윙 시대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실제 다이아나 크롤은 이 오케스트라를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 <Christmas Songs>(Verve 2005)에서 처음 기용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무엇보다 가족의 정, 다스함, 행복이 강조되어야 하는 음악이 아니던가요? 정말 이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그런 사랑스러운 사운드를 연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앨범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고 있습니다. 분명 클레이튼 해밀튼 오케스트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곡일수록 기쁨과 행복의 정서가 더욱 강조되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대형 오케스트라 편성을 두고 노래를 하다 보면 개인적인 정서가 다소 소홀해 질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나 크롤은 그녀와 함께 오랜 시간 활동해온 기타 연주자 안소니 윌슨을 중심으로 소편성의 노래도 불렀습니다. 이런 빅 밴드 음악에 소편성 음악이 결합되면서 앨범은 커다란 행복과 작은 기쁨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1. 이제는 행복을 느낄 시간

글쎄요. 다이아나 크롤의 이번 새 앨범을 통해 우리가 그녀가 느낀 행복을 그만큼 느낄 수 있을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이 앨범을 들으면서 우리는 한번쯤은 행복의 순간을 상상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지금 삶이 다소 우울해도 이런 음악에 맞는 삶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from this moment on!) 행복을 한번 느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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