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spicious Activity – Bad Plus (Columbia 2005)

새로운 곳을 향해 일보 전진한 배드 플러스

재즈는 언제나 시대와 호흡하는 음악이다.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기분 좋게 떠 올리기 위한 낡은 음악으로만 재즈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즈의 참 맛을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재즈는 언제나 뒤가 아니라 앞을 보면서 역사를 써왔다. 그리고 전진하는 재즈의 역사는 새로운 감상자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에 맞추는 동시에 새로운 취향으로 감상자를 이끌어 왔다. 그렇다면 현재의 감상자는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을까? 아쉽게도 재즈가 대중 음악의 한 가운데 위치하지 않다 보니 현재의 감상자는 단지 재즈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롹, 힙합, 테크노 음악에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았다. (지금 당신의 음악적 성향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래서 이들이 그루비한 느낌의 연주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 그루브는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젊은 연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에게 전통적인 의미의 스윙감을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재즈의 정통성이 사라졌다느니 하는 식으로 시대의 변화에 안타까워하지 말자. 이런 변화가 재즈를 새로운 장(場)으로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시대의 개척자 배드 플러스 

현재 배드 플러스는 새로운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시대를 개척하고 있는 트리오다. 분명 뛰어난 실력과 새로운 스타일을 지닌 여러 트리오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배드 플러스의 존재감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피아노 트리오 양식, 그러니까 긴밀한 인터플레이와 합주의 병행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음악에 불어 넣음으로써 젊은 재즈 애호가들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했다. 감상자들은 이들의 연주에서 롹 그룹 이상의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고, 스윙이 아닌 요동에 가까운 이들의 울퉁불퉁한 리듬의 전개에 몸을 흔든다. 이러한 배드 플러스만의 사운드는 각 멤버가 지닌 어린 시절의 음악 경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배드 플러스의 세 멤버는 모두 유년시절의 우정으로 뭉쳤다 할 수 있다. 드럼을 연주하는 데이비드 킹과 베이스 연주자 리드 앤더슨은 1984년 고교시절 롹 밴드에서 만난 사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에단 아이버슨은 리드 앤더슨과 1989년까지 아마추어 프리 재즈 그룹 활동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결국 배드 플러스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롹 음악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리듬과 자유 분방한 솔로의 전개는 이미 올핸 전에 잠재태(潛在態)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2000년이 되어서야 첫 앨범이 공개되었으니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형태, 숙성된 모습으로 이들의 음악이 다가왔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상한 활동>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다 

스페인 레이블 Fresh Sound New Talent를 통해 활동하다가 소니 컬럼비아라는 메이저 레이블로 이적한 후 발표한 두 장의 앨범 <These Are The Vistas>(2003)와 <Give>(2004)는 짧은 시간 동안 이 독특한 트리오가 지닌 대중적 흡입력과 미래 지향적 특성이 아주 강력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실제 코뿔소처럼 직진을 거듭하는 묵직한 힘과 롤러코스터 같은 폭넓은 요철(凹凸)이 느껴지는 리듬은 근래 보기 드문 신선함과 흥겨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다시 2005년 여러분이 지금 듣고 있는 <Suspicious Activity>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다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려 하는 배드 플러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흥미를 끈다. 이것은 앨범의 첫 곡 Prehensile Dream에서부터 감지된다. 아주 느리고 차분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이 곡은 그 주제는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브래드 멜다우를 연상시킬 정도로 어두운 색조의 이 주제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반복되면서 서서히 서서히 절정을 향해 상승한다. 그리고 망아(忘我)의 경지에서 폭발하는 듯하다가 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이것은 Lost Of Love에서도 하나의 방법론처럼 반복된다. 한편 제목과 달리 힘을 억제하고 나아가 서서히 방전시켜나가는 마지막 곡 Forces의 조용함은 또 어떤가? 소리 없이 공간의 울림만으로 몇 초간 지속되다가 우울한 멜로디를 끄집어 내는 연주는 한번 정도는 있을 법한 장렬한 폭발 없이 그대로 가라앉는다. 어찌 보면 또 다른 시대 개척형 피아노 트리오 E.S.T의 연주 전개 방식과 흡사한 이런 연주는 분명 이전 배드 플러스의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단순 테마의 강박적 반복과 그에 따른 상승과 하강의 분위기는 변용된 형태로 앨범 곳곳에 드러난다.

불변하는 배드 플러스만의 특성

그렇다고 이번 앨범이 이전 배드 플러스의 사운드와 단절된 모습을 들려준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보다는 보다 다양해진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번 앨범에 담긴 신선한 변화를 설명하는데 적합할 것이다. 분명 보다 길어진 호흡과 심사숙고적인 연주 태도가 만들어 낸 사운드의 이완과 부드러움은 이번 앨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주요 화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지난 앨범들에서 발견되었던 배드 플러스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도 유효하다. 여전히 이들은 롹 그룹 이상의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으며 세 연주자가 펼치는 솔로 연주의 현대성, 그리고 연주자간의 호흡도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특히 두 번째 곡 Anthem For The Earnest는 필자가 추천하는 이번 앨범의 백미가운데 하나다. 단순한 테마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이 곡은 감상자의 질주 본능을 자극하는 주술적 힘이 있다. 실제 필자는 배드 플러스도 참가했었던 지난 제 2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기간 동안-배드 플러스의 공연 현장에서 이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의뢰 받았다- 가평과 서울을 오가면서 이 곡만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곡에 취해 저절로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청춘 영화의 대명사 가운데 하나인 <비트>에서 정 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며 느꼈던 감정이 그런 것일까? 거침없이 새벽 세네 시 경의 어둠을 뚫고 질주하면서 필자는 아늑한 흥분을 느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추천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이런 강력한 질주 욕구에서 파생된 흥분은 Rhinoceros Is My Profession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된다.

새로운 피아노 트리오의 모범의 제시

사실 이전과 그다지 차이 없이 기존의 장점만을 가지고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고 해도 많은 감상자들은 큰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상태에서도 배드 플러스는 일보전진을 시도했다. 보다 정돈된 부드러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새로움은 기존 배드 플러스의 음악적 이미지, 특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배드 플러스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심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즉, 과감한 변화로 배드 플러스가 새로운 시기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시기란 보다 더 대중적 인기를 담보로 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자세는 위축되지 않는 단계다. 이를 통해 배드 플러스는 한 특정 시기의 사건으로서 새로운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장기 지속의 기간을 통해 새로운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모범을 제시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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