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명의 역사가 진보해온 것처럼 재즈는 지금까지 진보를 계속해 왔다. 아직도 재즈는 과거의 추억을 담고 있는 향수의 음악으로만 생각하는 애호가가 있다면 그는 재즈를 듣기 보다는 박물관에 전시된, 과거에는 자주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그다지 큰 용도를 지니지 못한 생활용품을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재즈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재즈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서 진보를 멈춘 것이 아니라 아직도 꾸준히 새로운 길을 찾아 용기 있는 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의 이러한 의견에 오늘 EST의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은 대부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EST야 말로 재즈의 시간을 미래로 한 발작 더 향하게 한 장본인들이니 말이다. 나는 Bad Plus, Tord Gustavsen Trio, Simple Acoustic Trio 등과 함께 E.S.T를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역사를 새로이 쓰는 리더로 평가하고 있다.
EST는 재즈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재즈의 방향을 미래에 둔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새로운 재즈의 방법론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이 트리오의 음악에 대해 극소수의 감상자들은 도대체 왜 이들의 음악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많은 수의 감상자들은 이들의 음악에서 미래지향적인 피아노 트리오의 형식과 정서적 매력에 빠져 있다.
에스뵤른 스벤슨(피아노), 단 베르글룬트(베이스), 마그누스 외스트룀(드럼)으로 이루어진 이 트리오의 시작은 오랜 유년 시절의 친구 사이인 에스뵤른 스벤슨과 마그누스 외스트룀이 1993년 단 베르글룬트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는 그다지 특별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음악적 주파수가 서로 맞았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이들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호흡을 과시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오랜 공동 활동이야 말로 EST의 음악이 성공을 거둔 요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들의 음악은 우연이 아니라 지속적인 세 연주자의 실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적 감흥을 중시하는 과거 미국의 재즈를 보면 앨범마다 연주자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배경하에 녹음된 앨범들은 철저히 순간의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최근까지도 일반적인 양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재즈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가 명인이라고 하는 연주자들의 뒤에는 누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마일스 데이비스의 경우 유명한 2기 퀸텟을 비롯하여 마일스 데이비스가 새로운 재즈의 시기를 개척할 때마다 비교적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정규 그룹이 있지 않았던가? 존 콜트레인은 어떠했던가? 맥코이 타이너, 지미 게리슨, 엘빈 존스로 이루어졌던 트리오와 함께 모달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를 개척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EST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주요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곤 하는 빌 에반스 트리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빌 에반스의 연주가 가장 훌륭했던 시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의 특정 트리오 멤버를 함께 거론하지 않던가?
결국 재즈는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악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재즈의 시대를 변화시키는 순간에는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시행착오를 거쳐온 정규 밴드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발전, 혁명이라는 것은 이를 이끌 천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천재의 영감을 수용하고 이를 현실화시킬 멤버들, 그리고 그들간의 정서적 공감, 호흡이 분명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EST가 만약 멤버를 교체해 가면서 존재했다면 과연 오늘 같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간다. 그저 피아노를 조금 독특하게 잘 연주하는 에스뵤른 스벤슨의 평범한 트리오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실제 EST의 앨범을 들어보면 모두 순간이 아니라 특정 시기 동안 만들어 낸 지속(持續)의 결과를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EST의 음악을 새로운 것으로 느끼게 했던 것일까? 빌 에반스 트리오가 제시했던 모던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방식을 이들은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이들도 빌 에반스와 그 트리오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의외로 이것은 가장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듯하다. 그러니까 트리오의 세 멤버들이 서로 리더인양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다른 멤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주를 정해진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그 방식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재즈 피아노 트리오로 인정을 받게 되는 이유는 이 가장 기본적인 전통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고 다른 방식을 생각했다면 이들은 재즈라 하기 보다는 흔히 Modern Creative라 불리는 새로운 음악의 영역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은 텔로니어스 몽크의 음악에서 새로운 표현에 대한 단초를 찾았던 듯하다. 이것은 1986년작 <EST Plays Monk>라는 앨범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적절한 단절과 침묵을 활용하여 어두운 긴장을 증폭시켜 나가는 것은 그 결과로서의 정서적 효과는 다를지 몰라도 텔로니어스 몽크의 피아니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새로워 보이는 E.S.T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전통에 입각한 음악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음악에서 과거보다 미래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은 세 연주자들이 자신의 감흥을 표현해 나가는 방식의 새로움에 있다. 그것은 어쿠스틱과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선명한 대비 효과로 정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 이들의 연주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이거 순수한 트리오 앨범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여기저기 드러나는 일렉트로닉스 효과음 때문인데 사실 이것은 피아노, 베이스, 드럼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다. 따로 키보드나 리듬 박스가 사용된 것도 아니고 후에 스튜디오 작업을 통하여 추가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순수 어쿠스틱 트리오 사운드를 바탕으로 새로운 소리의 정경을 탐구해 나간다. 그 소리의 정경은 때로는 테크노처럼 강박적인 리듬이 지배하고 때로는 롹처럼 폭발할 듯한 거칠게 증폭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실제 잠시 후의 공연을 통해 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이미 지난 2004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발에서 이들의 경이로운 연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평범한 어쿠스틱 베이스인데 단 베르글룬트의 베이스에서는 공간을 창조하는 신비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흘러 나왔으며 평범한 그랜드 피아노였는데 에스뵤른 스벤슨의 피아노 연주에서는 몽환적으로 공간을 부유하는 축축한 키보드적인 사운드가 들렸고 마그누스 외스트룀의 드럼 역시 리듬 머신 이상의 비현실적인 규칙성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들의 음악이 단지 오래된 재즈에서만 자양분을 섭취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실제 EST의 음악은 테크노, 롹, 그리고 현대 음악에 대한 이해나 최소한의 개방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쉽게 감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기타 장르의 음악을 이 트리오의 세 멤버가 공부가 아니라 성장 시 음악 감상의 주요 요소로 들어왔기에 이들 기타 장르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창조적 지점에서 모일 수 있었다. 혹자들은 그렇다면 그게 재즈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이들의 음악이 빌 에반스나 텔로니어스 몽크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 현대 재즈가 창조적인 무엇(Something Else)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들 기타 장르의 음악 자체를 추구하기 보다 이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즉흥적 창조물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의 음악을 재즈가 아니라 부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편 정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세 연주자는 기존의 재즈 연주자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이것은 멜로디나 상호 인터플레이가 주는 즉발적 감흥이 아닌 지속적인 반복과 서서히 서서히 약에서 강으로 상승하여 작렬하듯 급강하하는 이들만의 역동성을 통해서 음악적 정서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 테크노 음악의 리듬 패턴이 지닌 미니멀리즘적인 강박과 느림을 전제로 공상과학적인 몽환을 서서히 서서히 부재의 어둠에서 우주적 어둠으로 끌어 올리는 이들의 사운드를 통해서 감상자들은 긴장으로 가득한 우울한 환상을 꿈꾸고 그 사운드의 강약을 따라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공간 사이로 부유하듯 솟아오르는 에스뵤른 스벤슨의 오른 손 멜로디의 음울함이 주는 매력은 그 다음의 문제다. 이런 사운드는 <Strange Place For Snow>(2002), <Seven Days Of Falling>(2004), <Viaticum>(2005)로 이어지는 최근 앨범들을 통해서 EST의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들 세 앨범에 담긴 히든 트랙의 공상과학적 환상성은 언제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음악은 재즈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테크노, 현대 음악, 롹 음악 애호가들에게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즉, 이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인기는 바로 절대 다수의 재즈 애호가들의 반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타 장르의 애호가들의 반응에 기인하는 것이다.
지난 해 경기도 가평의 자라섬에서 비를 맞으며 들었던 연주들은 분명 한국에서 이들에 대한 인기를 보다 드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뛰어난 연주이긴 했지만 야외에 비가 내렸고 연주시간마저 짧았기에 이들의 음악이 지닌 매력을 시원하게 맛보기에는 다소 부족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제 오늘 이곳 음향 좋은 호암 아트 홀에서 우리는 비로소 EST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정말 어떤 감동을, 어떤 비현실의 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 것인지 숨을 고르며 객석에 앉아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