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es In Tokyo – Miles Davis (Columbia 1969)

지속(持續)의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와 그의 그룹

재즈 앨범을 하나씩 모으다 보면 너무나도 많은 연주자들이 모였다가 헤치기를 반복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보통 재즈를 자유의 음악이라 말하곤 하는데 적어도 명인이 되었건 평범한 연주자가 되었건 오로지 구도자처럼 혼자서 이리저리 다니며 많은 만남을 통해 자신을 계발하고 또 그 순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본다면 이러한 관점은 타당한 듯싶다. 하지만 모든 재즈 연주자들이 고독한 음악적 방랑을 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더라도 각 재즈 연주자들 간에는 서로를 이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음악적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싱싱한 즉흥 연주 속에서 탄탄한 조화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통 재즈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마일스 데이비스는 순간보다는 지속(持續)을 더 많이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물론 그도 여러 연주자들과 순간적 만남을 통해 살아 있는 즉흥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된 이후부터는 주로 다른 장르의 그룹들처럼 자신만의 그룹을 만들어 연주활동을 했으니 말이다. 특히 시기별로 다양한 멤버의 변화는 그대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적 진화를 설명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게다가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은 현재의 워킹 밴드(Working Band), 그러니까 앨범 녹음과 공연을 함께하는 밴드의 개념을 모범적으로 제시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가 그 그룹이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독특한 음악적 특성,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공연과 앨범 활동을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서로 같은 음악적 지향점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밴드가 진화의 절정에 도달하면 가차없이 마일스 데이비스는 기존의 그룹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멤버들로 새로운 재즈를 위한 판을 짜곤 했다.

이렇게 마일스 데이비스는 순간적 만남을 통한 일회적 연주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고정된 멤버들과 연주를 하며 기간을 두고 음악적 발전을 추구하기를 더 선호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음악적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도 마일스 데이비스 개인의 음악적 역량 외에 그 시기의 그룹의 완벽한 조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디스코그라피를 살펴보면 대부분 그룹 단위로 녹음한 스튜디오 앨범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964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특별한 모습을 담고 있는 앨범

그런데 새로운 음악적 변화기를 맞았던 1963년과 1964년의 마일스 데이비스의 디스코그라피는 아주 독특한 앨범을 낳았다. 그것은 고정된 그룹 멤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 활동을 했던 결과인데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는 유명한 편곡자 길 에반스와의 협력관계를 접고 새로운 그룹 사운드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행착오 끝에 조지 콜맨(테너 색소폰) 허비 행콕(피아노) 론 카터(베이스) 토니 윌리엄스(드럼)으로 이루어진 퀄텟을 결성하고 새로운 창조적 결과물을 생산할만한 호흡을 이를 정도에 이르렀지만 뜻밖에도 조지 콜맨이 탈퇴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이 빈자리는 후에 웨인 쇼터가 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그룹은 새로운 음악적 비약을 할 것이었다.) 이처럼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였기에 이 시기의 마일스 데이비스는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멤버들과 음악적 지향점을 공유하기 위한 이해의 시간을 가지려는 듯 오로지 공연 실황에만 신경을 썼다. 따라서 이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은 안정적인 그룹 연주가 주는 탄탄함보다 다소 불안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노력이 더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준다.

그 중 1964년 7월 14 일본 공연을 담고 있는 <Miles In Tokyo>는 그룹 연주의 탄탄함과 순간적 만남이 발생시킨 긴장적 관계가 동시에 느껴지는 앨범이다. 이것은 이 앨범이 조지 콜맨에서 웨인 쇼터로 색소폰 연주자가 바뀌는 그 사이에 녹음된 것으로 뜻밖에도 샘 리버스가 테너 색소폰 연주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샘 리버스는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와 별도로 대가적 길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존 콜트레인의 열정적이고도 자유로운 색소폰 연주에 경도된 새로운 연주자로 막 주목 받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일스 데이비스는 프리 재즈 성향의 연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와 그래도 이제 호흡이 완벽해 지기 시작한 다른 세 멤버들이 샘 리버스의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으리라는 점을 상상할 수 있다.

위기를 명연으로 극복하다 

그런데 샘 리버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일한 녹음이 일본에서 공연 실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사실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는 일본에서 잘 알려졌지만 샘 리버스 외에 다른 세 멤버들도 일본의 재즈 애호가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존재와 다름 없었다. 몰론 마일스 데이비스와 그룹 멤버들도 일본 무대가 낯설었다. 그러므로 마일스 데이비스는 어쩌면 이 일본 공연을 일종의 모험으로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다른 어느 때보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의 솔로 연주를 유감 없이 드러낸다.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 동안 그룹 연주를 하면서 일종의 대비 효과를 이용하곤 했다. 즉, 자신의 차가운 트럼펫 톤과 뜨거운 색소폰 톤과의 비교를 통해 긴장과 조화가 느껴지는 독특한 그룹 사운드를 연출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리듬 섹션의 안정적 뒷받침이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본 공연에서 마일스 데이비스는 차가움만큼이나 뜨거움으로 관객을 압도해 나간다. 특유의 뮤트 트럼펫으로 연주를 할 때조차 그는 상당히 공격적인 프레이징을 구사한다. 공연 장소와 멤버 구성이 주는 긴장감이 무조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샘 리버스의 연주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대가 앞에서 전혀 주눅을 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자세로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에 맞추어 앞으로 큰 연주자로 성장할 자신의 미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허비 행콕을 위시한 리듬 섹션 연주에 있다. 이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와 샘 리버스를 오가며 긴장과 안정을 동시에 생산해 낸다. 허비 행콕의 단절을 활용한 연주, 토니 윌리엄스의 공간을 차곡차곡 메워나가는 현란한 브러시 워킹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것은 분명 불안한 시기였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자양분을 충분히 습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04년 초겨울 프랑스의 유명한 재즈 레이블 라벨 블레의 제작자 피에르 왈피즈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현대 재즈의 의미에 관하여 물었더니 그는 Mise En Danger, 그러니까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재즈라는 독특한 정의를 내렸다. 다시 말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생경한 상황 속에 자신을 놓고 그 상황을 안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이 재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에르 왈피즈가 2004년에 내렸던 정의를 마일스 데이비스는 무려 40년 전에 몸소 보여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앨범을 들으며 다시 한번 마일스 데이비스가 지닌 거장으로서의 면모에 대해 새삼 감탄한다.

한편 이번 <Miles In Tokyo> 앨범은 여러모로 1961년도 녹음 <In Person At The Blackhawk, San Francisco>앨범과 비교하게 된다. 블랙호크 공연 실황 역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적 이행기를 담고 있는 앨범이었다. 당시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아들레이를 떠나 보낸 마일스 데이비스는 행크 모블리를 불러 공연을 했는데 음악적 완성도와 상관없이 마일스 데이비스는 행크 모블리와의 호흡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녹음된 <Miles In Tokyo>는 순간의 불안을 헤치고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 낸 멋진 사운드를 담고 있다. 이것을 마일스 데이비스 스스로도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샘 리버스는 블루 노트와 계약을 맺고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위해 과감하게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 머무는 것을 포기했다. 따라서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 머물렀던 시기는 단 몇 주에 지나지 않았다. 약 두 달 후 있을 마일스 데이비스의 베를린 라이브에는 웨인 쇼터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안정적 밴드의 출발을 의미하게 되리라.

사족) 그런데 1964년 일본 공연은 단 하루가 아닌 1주일간의 공연이었다. 분명 굉장한 공연이었으리라. 따라서 이 1주일간의 모든 공연이 새롭게 정리되어 앨범으로 발매되기를 바래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