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습의 나윤선을 만날 수 있는 일렉트로 재즈 앨범
유럽에서의 나윤선
우리는 재즈 보컬 나윤선이 유럽에서 얼마나 큰 인정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통상적으로 유럽에서 통하는 여성 보컬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럽에서 인정을 받아보았자 어느 정도겠냐는 식의 생각을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유럽에서 나윤선의 인기는 어느 영화의 카피처럼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상”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그렇다. 이것은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것이다. 지난 해 나는 프랑스에 가서 음반 매장 종사자, 음반 제작자 그리고 일반 재즈 애호가 등을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묻기도 전에 “아! 그럼 나윤선을 알고 있겠군”이라고 먼저 묻곤 했었다. 실제 프랑스의 음반 매장에서 나윤선의 앨범은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으며 프랑스의 재즈 전문지 <Jazzman>은 그녀의 음악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그녀는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여러 유명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가졌던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주앙 르 팽 재즈 페스티벌에서 키스 자렛을 만나게 된다”고 내게 자랑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는 그녀의 음악적 포용력이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그저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우리에게 심어진 전통적 재즈 보컬의 상을 뛰어넘은 다소 특이한 보컬로 인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그녀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을 보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노래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다지 쉬운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재즈의 개념에서 벗어난, 상당히 현대성을 띈 음악이 그녀의 음악이 아니던가? 이것은 지금까지 그녀의 앨범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처음에 그녀의 노래는 공감하기 쉬운 서정적 노래에서 앨범을 거듭할수록 미래지향적인 공간과 비정형적인 선율을 탐구하는 것으로 변화를 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음악적 관심사는 이러한 변화 이상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번 앨범에 담겨 있다.
리프랙토리 나윤선을 초대하다
이쯤에서 혹자는 앨범의 주인인 Refractory라는 낯선 그룹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왜 나윤선의 이야기만 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앨범 크레딧을 보기 바란다. 그렇다 내가 나윤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은 이 앨범에 나윤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앨범의 주인공은 아니다. 쟝 프랑소와 블랑코(프로그래밍, 키보드, 기타, 베이스 담당)와 루이 보두앙(색소폰과 편곡 담당)으로 이루어진 듀오가 리프랙토리의 공식 멤버이다. 그러나 나윤선은 키보드를 연주한 마티유 제롬과 함께 그룹의 세 번째 멤버 역할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운드에 대한 기억의 차원 이미지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녀가 전면에 드러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윤선이 등장한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인데 그 사운드가 우리가 생각하는 나윤선의 사운드와는 좀 다른 일렉트로닉 사운드이기에 놀랍다. 사실 이번 앨범에서 리프랙토리가 들려주는 음악은 약 6년 전부터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일렉트로 재즈다. 이 새로운 재즈는 현란한 리듬감각은 뛰어나지만 멜로디와 연주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DJ들과 여러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던 재즈 연주자들 가운데 새로운 질감의 사운드가 필요했던 연주자들이 양쪽에서 각자 발전시켜온 음악이다. 요즈음은 일렉트로 재즈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인식한 여러 음반사들이 다소 물타기 식으로 그저 재즈적 요소를 샘플링 했을 뿐인 테크노 앨범을 일렉트로 재즈 앨범이라고 발매하면서 좀 그 의미가 흐려지기는 했지만 현재 유럽에서 일렉트로 재즈는 퓨전 재즈, 스무드 재즈를 대신해서 많은 젊은 대중들에게 도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그 사운드로 인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아무튼 일렉트로 재즈는 테크노적인 감각과 재즈적인 감각이 만난 것인 만큼 이상적인 사운드는 DJ들의 샘플링 사운드를 기반으로 재즈 연주자가 직접 연주를 할 때 만들어질 확률이 많다. 리프랙토리의 주요 두 멤버가 나윤선의 목소리를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윤선 일렉트로 재즈 위를 춤추다
그런데 나윤선이 자신의 목소리를 어쿠스틱 사운드가 아닌 이러한 일렉트로 사운드에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국적인 일렉트로 라운지 뮤직의 대명사격이 된 클로드 샬의 Buddha Bar 시리즈에 그녀가 한국어로 노래한 “Road”라는 곡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역시 리프랙토리와의 공동작업이었다. 그러나 앨범 전체의 사운드에 중요한 요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그녀는 수록 곡의 절반인 5곡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알던 청아한 그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느낌은 확연히 다른 노래를 들려준다. 자신의 앨범에서 들려주었던 미성을 기반으로 시적으로 차분함에서 열정으로 상승하며 노래하던 모습과 달리 이 앨범에서 그녀는 상당히 육감적이다. 그리고 귀여운 맛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리프랙토리의 두 멤버가 이런저런 기계적 터치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윤선이 이 새로운 사운드 위에서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사운드가 그녀에게 잘 맞는 옷처럼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지난 짧은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어디 뭐 정신을 확 깨게 만들만한 새로운 것이 없느냐며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음악을 필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만큼 그녀는 새로운 사운드 위를 자유로이 유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모범적인 일렉트로 재즈 앨범
그러면 나윤선 이야기는 그만하고 앨범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더 살펴보자. 이미 말했다시피 이 앨범은 일렉트로 재즈 앨범이다. 그러나 사운드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어느 일렉트로 재즈 앨범보다 사운드의 질감이 풍성하고 다채롭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색다른 리듬 패턴이나 멜로디의 강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저변을 흐르는 공간적인 면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프랙토리의 두 리더가 재즈적인 입장에서 전체 사운드를 기획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를 위해 “Incantation”을 들어보기 바란다. 거대한 바람 속을 통과하는 듯한 스산한 키보드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Coincidence”는 아예 부다페스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원을 받아 사운드의 볼륨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곡들을 통해 리프랙토리는 단순히 리듬과 멜로디로 사각의 좁은 공간을 메우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보다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물결처럼 흐르고 변화하는 사운드를 만들려 했음을 명시한다.
한편 재즈적인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곡마다 필요에 의해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동원되었다. 나윤선 밴드의 멤버이기도 한 베이스 연주자 요니 젤닉과 드럼 연주자 다비드 조르줄레를 비롯한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새로운 질감의 사운드 위를 변함없는 감각적인 솔로를 들려준다. 이처럼 나윤선을 비롯한 재즈 연주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운드의 질감을 결정하고 있기에 나는 리프랙토리의 이번 앨범을 일렉트로 재즈의 이상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앨범으로 평가하고 싶다. 새로운 질감의 사운드를 추구하면서 리듬에 멜로디를 종속시키지도 않으며 강박적 반복에 자유로운 솔로를 파편화시키지 않은 것은 분명 많은 일렉트로 재즈가 안고 있는 한계점에 대한 의미 있는 해답이다.
물론 이 앨범을 구입한 많은 감상자들은 나윤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앨범 감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나윤선을 포함한 전체 연주자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일렉트로 재즈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