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버튼(Gary Burton)의 음악 세계

*지난 2004년 내한 공연을 위해 쓴 해설이다.

언제나 젊은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이미지, 선입견을 갖고 있는가? 당신이 아예 이 비브라폰 연주자를 모르고 있다면 이러한 질문은 무례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이 게리 버튼과 그의 음악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읽게 되었다고 보기에 필자는 다시 한번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리 버튼은 어떤 사람인가? 물론 여기엔 그저 비브라폰 연주자라는,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냉소적인 느낌의 답변부터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를 연주한 인물이라는 최근 그의 활동에 중점을 둔 답변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필자 역시 이번 공연 프리뷰를 준비하면서 필자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게리 버튼을 떠올려 보았다. 그 결과 위에 간단하게 언급했던 사항들을 포함하여 여러 이미지들이 연상되었는데 그 중 가장 확연하게 떠올랐던 것은 그의 젊음이었다.

현재 게리 버튼은 비브라폰의 대가, 비르투오조로 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대가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평생을 한가지 분야에만 집중해 온 나이 지긋한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게리 버튼의 경우는 비브라폰의 대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이상하게도 젊다는 느낌이 우선한다. 즉, 팻 메스니, 래리 코리엘, 믹 구드릭 같은 기타 연주자들과 재즈 롹/퓨전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거나 아니면 칙 코리아와 듀오로 수정처럼 빛나는 침묵(Crystal Silence)을 들려주었던 1970년대의 게리 버튼과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를 연주하는 게리 버튼, 오늘 함께 공연을 펼칠 마코토 오조네와 농밀한 듀오 연주를 펼치는 게리 버튼, 그리고 극히 최근-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아직 그 앨범이 발매되지 않았지만- 16세의 어린 기타 연주자 줄리안 라게와 새로운 듀오 연주를 펼치는 2000년대의 게리 버튼간에 그다지 큰 시간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 외에 연주자의 연대기적 삶의 궤적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필자의 경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게리 버튼은 이제 60을 훌쩍 넘겼음에도 필자에게만큼은 아직도 30대의 모습 그대로의 이미지가 강하다.

초기부터 확립된 게리 버튼만의 음악

그렇다고 필자가 게리 버튼의 음악이 발전이 없고 늘 유사한 스타일의 연주만 들려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그를 탈 시간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음악이 데뷔 당시부터 확고한 자신만의 정체성과 완성된 연주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첫 번째 리더 작이었던 <New Vibe Man In Town> (RCA 1961)을 들어보기 바란다. 필자는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현재의 게리 버튼과 별반 다른 점이 없는 연주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에 불과한 나이로 녹음한 이 앨범에서 게리 버튼은 당시까지 비브라폰 연주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었던 밀트 잭슨, 라이오넬 해밀턴 같은 선배 연주자들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실제 앨범 녹음 당시까지 그는 이 선배들을 몰랐었다고 한다 – 그만의 독창적인 새로운 연주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사운드는 뜨거웠던 50년대를 이제 막 벗어난 60년대 초반의 재즈 사운드로서는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새로운 것이었다. 분명 여러 개의 말렛(Mallet, 비브라폰을 두드리는 채)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코드, 비브라폰 특유의 몽롱한 울림을 충분히 고려한 즉흥 연주, 투명하면서도 따뜻한 톤 컬러 그리고 신선한 음악 전반에 흐르는 낭만적 기조 등은 1961년이 아닌 현재의 게리 버튼의 음악과 연주에 그대로 적용하더라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요인들이다. 이처럼 게리 버튼은 데뷔 당시부터 완성된 실력과 과거를 무조건 따르지 않는 쇄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40년이 훨씬 넘은 그의 개인적 음악사는 발전보다는 변화의 역사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다.

이렇게 게리 버튼이 시작부터 이전의 연주자들과 다른 음악과 연주를 들려주었던 것은 당시 18세의 나이였지만 이미 비브라폰을 10년째 연주해오고 있었다는 사실과 특정한 전형 없이 오로지 독학을 통해서 비브라폰의 다양한 연주 가능성을 이해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오로지 연주의 즐거움 자체에만 몰입하여 기술을 연마한 다음에서야 재즈라는 장르와 선배 비브라폰 연주자들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상태에서 확립된 그만의 정체성은 이후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이나 장르적 규범을 습득함에 있어 절대적 추종이 아닌 선택적 추종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게리 버튼이 재즈를 넘어 클래식, 탱고 등 장르를 탄력적으로 오가는 독자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으며 매번 높은 완성도를 유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지금까지 5 차례 그래미 상을 수상했고 13차례 수상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기타 연주자들

국내에서 게리 버튼의 연주를 오래 전부터 좋아해온 감상자들 대부분은 그의 음악을 앨범 <Passengers>(ECM 1977)을 통해서 처음 접하지 않았나 싶다.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부단히 앞으로 전진하는 듯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이 앨범 역시 필자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앨범이었다. 그런데 재즈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었던 당시 필자는 이 앨범을 롹 앨범으로 생각하고 롹의 관점에서 앨범을 감상했다. 그래서였는지 당시 필자의 귀에는 게리 버튼의 비브라폰 대신 팻 메스니라는 낯선 인물의 기타 연주가 더 귀에 들어왔다.

사실 초기부터 게리 버튼은 기타, 특히 롹적인 느낌의 전자 기타가 포함된 편성을 선호했다. 아마도 전자 기타가 롹의 인기와 함께 60년대의 시대적 감수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악기로 부각되었다는 것이 늘 새로운 쪽에 시선을 둔 게리 버튼에게는 큰 매력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데뷔 당시 녹음했던 몇 장의 앨범 이후부터 그의 앨범에는 전자 기타가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롹적인 성향의 전자 기타와 함께 녹음한 앨범들, 엄밀하게 말한다면 기타 연주자 래리 코리엘이 함께 했었던 앨범 <Duster>(RCA 1967)부터 본격적인 게리 버튼 식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충격적인 첫 앨범으로 돌아간다면 이 앨범의 신선한 느낌은 게리 버튼이 이미 재즈 대신 대중 음악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롹의 발랄함을 수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자 기타가 포함된 편성의 연주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역시 게리 버튼처럼 롹 음악의 커다란 대중적 매력과 새로운 질감의 강력한 사운드에 매료되어 새로운 재즈를 꿈꾸며 기타 연주자 존 맥러플린을 불러 <Bitches Brew>(Columbia 1970)을 녹음했던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필자는 게리 버튼이야말로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재즈 롹/퓨전의 진정한 선구자였다고 부풀리고 싶지 않다. 단지 필자는 이미 언급했듯이 그가 꼭 전통적인 재즈가 아닌 새로운 영역에 개방적 자세를 취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개방적 성향은 음악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는 연주자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하고 싶다. 아무튼 래리 코리엘-물론 이전에 짐 홀이나 쳇 앳킨스 등의 기타 연주자와 함께 하기도 했었지만 롹적인 그의 성향에 국한시켜 생각하자- 이후 믹 구드릭, 존 스코필드, 팻 메스니, 볼프강 머스피엘 같은 기타 연주자들이 게리 버튼 그룹의 멤버로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당시 팻 메스니처럼 게리 버튼을 통해 갓 데뷔한 경우부터 이미 확고한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획득한 경우(존 스코필드), 오랜 동료(믹 구드릭)등 게리 버튼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했었지만 공통적으로 이 연주자들은 게리 버튼이 자신의 음악을 유지하고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단초로서 큰 역할을 했다.

다양한 듀오 활동

한편 게리 버튼의 음악 이력에 있어서 그룹 연주 외에 듀오 연주 활동 또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룹 연주가 전체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리더인 본인을 비롯한 여러 구성원들이 보조를 맞추며 전진하는 것이라 한다면 듀오 연주는 1대 1로 상대를 마주보고 긴밀한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듀오 연주는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게리 버튼의 이력에서 듀오 연주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그와 듀오로 연주한 연주자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특이한) 베이스 연주자 스티브 스왈로우, 기타 연주자 랄프 타우너,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 칙 코리아가 그 대표적 인물들인데 그 중 칙 코리아와의 듀오 연주는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 두 연주자는 1972년 <Crystal Silence>(ECM 1973)을 녹음한 이후 1997년의 <Native Sense: The New Duet>까지 4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 4장의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알터 에고(Alter Ego)인양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서로가 서로를 꾸며주는 차원에서 한 단계 나아가 하나의 멜로디라인을 자연스럽게 이어서 진행시키는 절정의 호흡을 보여주었다.

마코토 오조네와의 활동

지금까지 오늘의 공연이 게리 버튼과 마코토 오조네의 듀오 공연임에도 필자가 게리 버튼만 이야기하는 것에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마코토 오조네 역시 현재의 시점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재즈 피아노의 대가이지만 그 역시 게리 버튼에게 발탁되어 본격적인 지명도를 쌓을 수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게리 버튼에게 이 글의 초점을 맞추는 필자의 태도가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기타 연주자를 더 선호했던 게리 버튼은 듀엣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피아노 연주자와 녹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4년 그는 당시 21세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인 피아노 연주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마코토 오조네였다. 그래서 그는 마코토 오조네를 자신의 그룹에 포함시켜 <Real Life Hits>(ECM 1985)를 녹음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의 음악적 유대감이 꽃을 피게 된 것은 앨범 <Face To Face>(GRP 1995)에서부터였다. 듀오로 녹음한 이 앨범은 흔히들 말하는 게리 버튼과 칙 코리아의 듀오 연주의 재현이라고만 표현하기 곤란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 앨범에는 이후 콩코드 레이블로 이적하여 새로운 음악적 전기를 맞이할 게리 버튼의 모습이 예견되어 있다.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곡을 연주한 “Laura’s Romance”가 그 실례다. 실제 게리 버튼은 콩코드 레이블에서 그 동안의 그룹 연주와 듀오 연주와 함께 새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연주를 시도했는데 그 결과물인 두 장의 앨범 <Astor Piazzolla Reunion-A Tango Excursion>(1998), <Libertango: The Music Of Astor Piazzolla>(2000)에서도 마코토 오조네의 이름은 발견된다. 이처럼 마코토 오조네 역시 게리 버튼만큼이나 폭넓은 음악적 개방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게리 버튼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두 연주자가 2002년도 앨범 <Virtuosi>에서 클래식의 유명 테마들을 이들만의 독창적 감각으로 편곡하여 연주했던 것도 마코토 오조네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게리 버튼은 지금까지 함께 했던 대화 상대 중에서 마코토 오조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 함께하게 될 공연 역시 이제 20년에 접에든 두 연주자의 긴밀한 유대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섣불리 칙 코리아와 게리 버튼의 듀오 연주에 대한 향수로 오늘의 공연에 접근하지 말기 바란다. 그저 이 두 연주자가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이를 통해 얼마나 멋진 조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지 차분하게 집중하기 바란다. 마치 게리 버튼이 아무 선입견 없이 비브라폰을 배웠고 또 새로운 연주자를 발굴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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