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라즐로의 과거와 현재를 담고 있는 멋진 앨범
얼마만이던가?
필자는 빅토르 라즐로(Viktor Lazlo)의 베스트 앨범을 새로 국내에서 기획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지난 사랑을 회상하듯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것은 필자의 음악적 취향이 롹 음악에서 재즈로 서서히 바뀔 무렵 새로운 음악적 감수성을 제공했던 사람이 바로 빅토르 라즐로였기 때문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낭만적인 목소리로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노래들은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았던 필자의 생경한 20대 초반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당시 국내에 발매되었던 <The Exclusive Collection>, <Poison>같은 앨범을 사람 많은 지하철, 모든 것이 흔들리는 밤 거리,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 찼던 기차 여행 속에서 듣곤 했었다. 그리고 나아가 불어를 전공했던 필자가 프랑스 행을 꿈꿨을 때 그 속에는 빅토르 라즐로의 숨겨진 음악들을 들을 수 있다 막연한 기대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 프랑스 체류 시절 마치 추억의 여인에 대한 흔적을 찾듯 그녀의 근황에 대해 주변 프랑스 사람들에게 묻곤 했었다. 일종의 열병과도 같았던 그녀의 노래에 대한 애정은 그녀의 새로운 앨범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으면서 조금씩 식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녀의 노래들은 필자에겐 향기로운 추억을 지닌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그녀의 추억과 현재를 함께 담고 있는 앨범 <Champagne & Wine: The Love Collection>이 새로이 발매된다는 것이 필자로서는 무척 반갑다.
음악적으로 이러하다 저러하다를 말하기 앞서 빅토르 라즐로의 음악은 정서적으로 감상자에게 먼저 접근한다. 그리고 그 접근은 때로는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노래하는 요염한 여인네의 유혹처럼 뇌쇄적이고 때로는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사랑을 떠나 보낸 수줍은 소녀의 슬픔처럼 순수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그녀의 음악이 지닌 다소 상반되는 매력들은 그녀의 노래들이 특정 장르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녀의 노래에는 전통적인 샹송이나 최근의 프렌치 팝(Variété Française), 라틴 팝, 그리고 재즈적인 요소들이 혼재 되어 드러난다. 이러한 여러 스타일의 혼재는 그녀의 음악적 관심과 소화의 폭이 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장르에 상관없이 오로지 그녀만의 정서가 제대로 표현되는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녀는 부르고 싶은 노래를 솔직하게 노래하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녀가 단지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의 빅토르 라즐로라는 인물에 감동 받아 남성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여러 제약에 개방적인 자세를 보이는 그녀의 성향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음악은 다른 어느 음악보다 그 자체로서만 감상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 그녀의 음악은 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에 의해 빅토르 라즐로 풍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예로 이 베스트 앨범의 첫 곡인“Champagne & Wine”의 달콤한 재즈 풍의 노래와 “En Cas D’amour”같은 소울 비트의 멜로딕 팝 곡은 스타일과 분위기에서는 분명 확연한 “다름”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빅토르 라즐로의 벨벳 같은 목소리를 통해서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한편 그녀의 노래들은 현재와 과거, 미국과 유럽이 공존한다. 이 앨범에서도 30,40년대의 스윙 재즈가 인기 있었을 당시의 미국의 한 클럽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Hey Baby Cool”같은 곡부터 우수 어린 비엔나의 가을을 노래하는 “Long Distance”나 새로운 편곡으로 노래하는 “Amores(Besame Mucho)”같은 곡에서 느껴지는 현대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이렇게 여러 음악의 혼재, 과거와 현재, 미국과 유럽의 분위기 등 서로 대조적인 요소들이 조화의 관계를 이루며 빅토르 라즐로만의 정서적 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그녀의 특별한 삶 자체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미 그녀의 오랜 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그녀는 순수한 프랑스 인이 아니다. 그녀는 프랑스령인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출신의 아버지와 역시 카리브해의 (당시엔 영국령이었던) 그레네이드(Grenade)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두 부모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네덜란드어까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실로 세계의 주요 언어는 다 구사할 줄 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 국가의 언어로 자유로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에 제대로 동화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그녀의 음악들에서 다양한 언어와 음악적 분위기를 통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교차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녀가 곡마다 언어를 바꾸어 노래하는 것은 단지 다양한 언어권의 감상자들에게 쉽게 접근하려는 의도 때문만이 아니라 곡이 요구하는 정서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음악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앨범은 첫 곡 “Champagne & Wine”을 타이틀 곡으로 하고 있으면서 “The Love Collection”이라는 부제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한국에서 그녀의 인기를 가져다 준“Champagne & Wine”이 앨범의 제목이 된 것을 이해하면서도 “The Love Collection”이라는 부제가 그녀의 음악을 보다 더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앨범 수록 곡 모두가 속삭이는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빅토르 라즐로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서정적인 곡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노랫말들이 모두 사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매된 그녀의 새 앨범이 <Amour(s)>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다양한 연애 경험에서 출발한 노래들을 담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녀의 음악이 지닌 가장 큰 원천은 사랑이다. 그리고 주로 그녀가 작사하는 사랑 노래들은 마치 개인의 다양한 경험을 노래를 통해 은밀히 드러내듯이 속으로만 사랑하다 헤어져야 했던 인연의 아쉬움부터 기다림의 갈증, 실연의 고통, 연애의 고민, 사랑을 하고픈 욕구, 사랑할 때의 흥분과 기쁨 등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여러 단면들은 빅토르 라즐로의 개인적인 맛이 강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감상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모든 곡들은 빅토르 라즐로라는 타인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 차원을 넘어 감상자의 가슴 안에서 감상자 개인의 경험과 결합하여 다시 한번 자신의 사랑을 반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필자는 빅토르 라즐로와 감상자가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이 사실이 그녀의 노래가 세계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어까지는 몰라도 불어 등 다른 언어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은 한국의 애호가들에게는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 앨범에 각 가사에 대한 필자의 졸역을 첨부하지만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원래의 가사가 지닌 단어의 미묘한 맛, 각운,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이해가 아닌 오해를 낳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빅토르 라즐로의 노래들은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감상자에게 가사의 정서를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막연하지만 아련한 각 곡에 내재된 정서는 감상자에게 보다 더 생생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편 이번 앨범은 국내에서 새롭게 기획한 앨범이지만 최근 빅토르 라즐로의 활동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1990년대부터 빅토르 라즐로는 노래보다는 연극과 영화에서의 연기 활동에 더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녀에 내재된 여러 재능을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와 분위기 있는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녀는 의욕적으로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새로이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샹송을 담고 있으면서 파리에서 그녀만의 특별한 쇼 공연과 함께 공개된 <Loin De Paname 파리에서 멀리>와 개인적 사랑의 경험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Amour(s)>가 그 두 장의 앨범에 해당한다. 국내에서 발매되는 이 베스트 앨범은 <She>, <Victor Lazlo>, <Hot & Soul>, <My Delicious Poisons>같은 그녀의 이전 앨범의 대표 히트 곡들을 중심으로 수록하고 있으면서도 “Si Moi, Si Lui”, “Danse”, “En Cas D’amour”, “Sound Of Expectation”, “It’s Message For You”, “Amores(Besame Mucho)”등 <Amour(s)>의 수록 곡들을 대거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앨범이 그녀의 지난 음악을 정리하는 한편 새로운 국내에서 그녀의 인기를 재 점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를 몰랐던 새로운 감상자들에게도 그녀의 노래들은 분명 새로운 반향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자 이제 플레이어에 음반을 걸고 그녀를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