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자작곡 앨범
지금까지 게이코 리는 대부분의 보컬들처럼 스탠더드를 줄곧 노래해 왔다. 그리고 스탠더드를 노래함에 있어서도 매번 새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스탠더드 노래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해 발표했었던 <Sings Super Standards>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냈던 좋은 예가 아니었나 싶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재즈의 스탠더드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음악의 좋은 곡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래함으로써 그녀가 이제 보컬로서는 완숙의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를 인식했던 것일까? 일년 만에 발표한 새 앨범 <Vitamin K>에서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곡이 아닌 그녀 자신의 작곡으로만 앨범을 채우고 있다. 사실 스탠더드가 아닌 자작곡을 노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표현하기에는 그만이지만 감상자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왜냐하면 스탠더드 곡은 이미 그 자체에 고유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색다른 편곡이라 하더라도 감상자가 수용하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이 되지 않지만 새로 작곡한 곡들은 그 자체에 그만큼 명확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감상자에게 호응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까지 게이코 리의 노래와 음악들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감상을 유도하는 것들이었기에 이러한 부담은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공존
그러나 게이코 리가 그 동안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곡들을 큰 비중은 아니지만 매 앨범마다 적절히 배치시켜 왔음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금방 해소된다. 실제 앨범에 수록된 11곡 가운데 7곡은 게이코 리가 기존 앨범을 통해 이미 선보였었던 곡들이다. 따라서 이 7곡만큼은 최소한 게이코 리의 팬들에게는 낯설다기 보다는 일종의 친숙한 스탠더드 곡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 게다가 처음 선보이는 4곡도 그 중 3곡이 일본 내에서는 이미 만화영화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었던, 그래서 국내 애호가들에게는 효력을 지니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일본 팬들에게는 익숙한 곡들이다. 앨범의 4번째 트랙 “Diamonds In The Snow”는 세이코 시계의 루키아(Lukia) 제품 시리즈 광고에 사용되었던 음악을 이번 앨범에서 새로이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7번째 트랙 “The Flame”과 8번째 트랙 “The Moment Of Love”는 각각 TV용 만화영화 <항간에 떠도는 100가지 이야기> 의 오프닝과 엔딩 테마로 사용된 곡들이다. 이처럼 스탠더드가 아닌 자작곡을 노래하지만 이번 <Vitamin K>는 익숙함이 새로움을 감싼다.
그녀의 보컬과 함께하는 사운드 역시 이전과는 자못 다른 성격을 띠면서도 익숙함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그다지 주도적이지 않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등 컨템포러리 재즈에 가까운 면을 보인다. 이러한 사운드는 이전에서도 곡에 따라 부분적으로 느낄 기회가 있었지만 앨범 전체가 컨템포러리 성향의 사운드로 채워졌던 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그녀의 자작곡이 주는 낯선 느낌을 편안하고 부담 없는 컨템포러리 사운드로 보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사운드의 새로움 역시 신선한 느낌을 줄뿐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이것은 참여하고 있는 연주자들의 전자적인 효과 속에서도 어쿠스틱적 감각을 잃지 않는 연주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게이코 리의 이전 앨범에서도 호흡을 맞추었던 도키도키 몬스터즈와 기타 연주자 지로 요시다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게이코 리의 보컬을 제대로 이해하고 여기에 정서적으로 호응하면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젊어진 감수성
그런데 사운드가 기존 게이코 리의 음악 성향을 따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게이코 리의 보컬에 약간의 변화를 유도한 것은 분명하다. 그 변화는 기교적인 변화보다는 색의 변화에 가까운 것이다. 이 앨범에서 게이코 리의 보컬은 더 젊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비타민(K!)의 새콤한 맛이 느껴진다고 할까? 나이와는 조금 맞지 않는-그녀는 1965년 생이다. – 미니 스커트를 입은 앨범 표지에서의 모습만큼이나 그녀의 보컬은 20대의 젊은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보컬이 지닌 깊이가 줄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보컬이 지닌 매력은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여전히 새로운 사운드에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케이코 리 특유의 허스키한 보컬은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 낸다. “The Wonder Of Love”, “Don’t Break My Heart”, “Forever” 등의 곡에서 느껴지는 그녀만의 서정미는 기존의 게이코 리의 팬들에게는 변함없는 그녀의 건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고 새로운 감상자들에게는 게이코 리의 노래가 지닌 정서적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리라 생각된다. 특히 현재 팻 메스니 그룹과 솔로 활동을 통해 훌륭한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리차드 보나가 게스트로 참여한 “The Wonder Of Love”는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이번 앨범의 백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차분한 RnB 성향의 사운드 위를 흐르는 게이코 리의 감정에 과장이 없는 담백하고 편안한 노래와 리차드 보나의 몽환적인 백 보컬과 허밍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조화는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하다.
뮤지션 게이코 리-새로운 음악의 예고?
끝으로 앨범 타이틀 곡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앨범의 타이틀 곡인 “Vitamin K”는 게이코 리를 잘 아는 감상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곡이다. 왜냐하면 펑키한 사운드에 랩까지 등장한다는 것은 기존의 게이코 리의 모습에서는 전혀 유추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저절로 “이게 뭐야?”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곡이 앨범에서 그저 오프닝 곡 정도의 의미를 지니지 않아 아쉽지만 마지막 트랙에 연결된 히든 트랙으로 이 곡의 세션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그녀가 의외의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설령 이러한 시도가 일회성에 그친다고 할 지라도 <Vitamin K>는 전체적인 면을 고려할 때 앞으로 게이코 리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 생각된다. 다른 사람의 곡을 노래하지 않고 자신의 곡을 노래한다는 것은 단순한 보컬에 머무르지 않고 사운드는 물론 앨범 전체의 방향 설정까지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연주자보다는 뮤지션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과거와 부드러운 연속을 지니면서 명확하게 자신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는 이번 앨범을 통해 이제 게이코 리는 보컬을 넘어 뮤지션으로 새롭게 자신을 정의한 셈이다. 그래서 뮤지션 게이코 리의 앞으로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혹시 정말 앨범 타이틀 곡처럼 펑키한 비타민으로 힘을 얻은 게이코 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