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의 낭만을 표현한 다이안 슈어 최고의 앨범
다이안 슈어는 전통적인 여성 재즈 보컬의 계보를 잇고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유연한 보컬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흑인들의 전유인 강한 소울 필링의 노래를 소화하는 동시에 백인 풍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소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브라스 섹션이 분수처럼 치솟는 강렬한 빅 밴드에 맞서 끝을 모를 정도로 한 없이 상승하는 목소리로 열정적인 노래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보다 대중적이고 팝적인 성향의 퓨전 사운드를 배경으로 힘을 살짝 빼고 부드럽게 노래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다양한 사운드에 탄력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전천후 보컬리스트라는 것인데 그렇기에 그녀는 전통적인 측면이 강한 앨범과 보다 대중적인 앨범을 필요에 따라 녹음하며 재즈의 전통을 잇는 한편 대중적 사랑 또한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 결과 지난 80, 90년대를 대표하는 보컬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앨범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한번에 드러냈다 할 수 잇는 앨범은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녀의 명작 가운데 하나인 <Diane Schuur & the Count Basie Orchestra>(GRP 1987)의 경우 전통적 재즈 보컬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는데 집중한 것이었고 반면에 대중적 사랑을 얻었던 <Friends For Schuur>(Concord 2000)의 경우 팝적인 부드러움을 표현하는데 집중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자신의 보컬 능력을 종합적으로 드러내고자 여러 앨범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스탠더드 곡을 보다 부드러운 사운드로 노래하는 차원에 머무르곤 했다.
다이안 슈어의 매력을 종합적으로 담아낸 앨범
그러나 뒤늦게 국내에 라이선스 앨범으로 소개되는 앨범 <Midnight>은 이전, 그리고 이 앨범 이후의 앨범까지 생각해도 가장 자연스럽게 다이안 슈어의 음악을 종합적으로 담아낸 앨범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고 나면 보면 탁월한 기교와 정서 표현력을 지닌 보컬로서의 면모, 대중적 사랑을 얻을 수 있는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보컬, 다양한 사운드를 편안하게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보컬로서의 다이안 슈어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다이안 슈어의 모든 것을 담아낸 백화점 식 앨범이라고나 할까? 물론 아무리 매력적인 것이라도 백화점 식 나열에 그치면 그 앨범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 모든 매력을 하나의 포장으로 묶었다는 것이 앨범 <Midnight>의 뛰어난 점이다.
그렇다면 다이안 슈어는 어떻게 자신의 장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이안 슈어의 보컬 기교나 음악 스타일을 하나의 정서, 분위기 안에 모으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다름 아닌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는 “깊은 밤”, “심야”의 분위기다. 그러니까 하루가 바뀌는 시간, 하루의 바쁜 시간들이 지나가고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 모든 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사적인 편안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표현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모든 매력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앨범 안에는 빅 밴드 스윙 재즈부터 보사노바, R&B, 블루스, 어덜트 팝(Adult Pop)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평화로이 공존한다. 그러나 하나의 정서 안에 모여 있기에 어지럽다거나 사운드의 균질감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친 클럽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놓고 개인적이고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다이안 슈어의 심야 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쇼에는 몇 명의 보컬이 게스트로 참여할 것이다. 실제 앨범은 쇼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흥겹고 낭만적 분위기의 빅밴드 스윙 곡 “Meet Me Midnight”으로 시작되어 카린 앨리손과 함께 한 경쾌한 블루스 곡 “Stay Away From Bill”, 브라이언 맥나잇과 함께 한 애절한 R&B 발라드 곡 “I’ll Be There”,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쓸쓸한 발라드 곡 “He Loved Me”, 감미로운 보사노바 곡 “Our Love Will Always Be There” 등으로 이어진 후 베리 매닐로우와 함께 한 사랑의 듀엣 곡 “Anytime”으로 마감하는 식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구성을 띄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점점 더 깊어가는 밤과 그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유쾌함, 안락함을 세세하게 집어나가고 있다.
배리 매닐로우와 함께 만든 심야의 낭만적 분위기
그런데 이러한 심야의 낭만적 분위기는 재즈를 오랜 시간 들어온 감상자라면 어딘지 낯익은 데자 뷔(Déjà Vu)의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앨범에 수록된 “When October Goes”, “Good-Bye My Love”를 다시 들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앨범의 제작자가 배리 매닐로우라는 점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배리 매닐로우의 1985년도 앨범 <2:00 AM Paradise Cafe>가 희미한 기억의 저편에서 솟아오름을 느낄 것이다. 배리 매닐로우의 이 앨범은 1985년 발매 당시 사라 본, 먼델 로우, 제리 멀리건, 멜 토르메 등 쟁쟁한 재즈 명인들을 초청하여 잠 못 이루는 새벽 두 시의 달콤한 낭만을 멋지게 표현했다는 평가 속에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 막 쿨한 성향의 첫 앨범 <Deedles>(GRP 1985)를 녹음했던 다이안 슈어 역시 이 앨범의 매력에 푹 빠졌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저런 앨범을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래서 약 20년 뒤 배리 매닐로우에게 직접 앨범의 제작을 의뢰하여 심야를 주제로 한 이번 앨범 <Midnight>을 녹음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배리 매닐로우는 이 앨범의 제작을 담당하면서 심야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직접 작곡에 참여했다. 실제 앨범은 베리 매닐로우가 혼자 작곡했거나 자신의 음악 파트너 에디 아킨과 공동으로 작곡한 곡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베리 매닐로우는 이 곡들을 다이안 슈어의 다양한 매력을 살리기 위해 다채로운 편성, 분위기, 스타일을 사용하여 편곡했다. 이로 인해 앨범은 배리 매닐로우의 앨범 <2:00 AM Paradise Cafe>의 분위기를 모범으로 삼았으면서도 내용의 측면에서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즉, 과거 배리 매닐로우가 어덜트 팝 가수로서 재즈 명인들과 함께 재즈를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면 다이안 슈어는 이와는 반대로 다양한 사운드와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그 안에 매력을 담아 노래할 수 있음을 보려주려 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앨범은 정서적으로는 감미롭고 음악적으로는 진지하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이 앨범에 다이안 슈어의 모든 매력, 모든 음악적 능력이 종합적으로 투영되어있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20년 전 문을 닫았던 파라다이스 카페는 다이안 슈어를 통해서 새롭게 문을 연다. 단지 시간이 새벽 두 시에서 자정으로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은 같다. 한동안 잊혀졌던 카페의 분위기는 여전히 감미롭고 부드럽다. 현실을 잊고 그 달콤함 속에 무한정 안주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유발하는 분위기를 지닌 카페, 이 카페의 주인은 다이안 슈어다. 그녀가 카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