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처럼 일상을 감싸는 음악
가벼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봄날 오후, 희미하게 뜬 눈에 언제나 다름없는 마당이 들어온다. 마당 한쪽의 장독대에 올려놓은 몇 개의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꽃들이 바람에 가벼이 흔들린다. 그리고 시선을 열린 대문 사이로 돌리면 술래잡기를 하는 꼬마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감자를 가득 실은 트럭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감자 한 상자에 만원”이라는 남자의 쉰 목소리가 동네를 가득 메운다. 그 소리가 싫어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면 음악이 있다. 담백한 맛의 기타와 포근한 보컬이 들린다. 그제서야 잠들기 전에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구석에 여백이 드러나는 수묵화가 그려진 앨범 표지가 보인다. 시계가 3시를 알린다. 그렇게 아무 특별한 일도 없이 나른하게 오후가 흘러간다.
이상은 필자가 Be The Voice(이하 BTV)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였다. 어린 시절의 사소한 기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다지 의미 없게 느껴지는 하루 일상의 단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나가는 듯한 소박한 노래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며 필자는 BTV의 음악을 공기와 같은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특정 인물의 소소한 개인사를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개인의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음악 같다는 것이다.
BTV는 작곡과 보컬을 담당하는 준코 와다와 기타와 키보드,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슌지 스즈키로 구성된 듀오다. 이들은 1996년 11월에 만나 듀오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12월 Consipio 레코드의 오디션에서 Yellow Magic 오케스트라의 유키히로 다카하시의 눈에 띄어 Be The Voice라는 이름으로 앨범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첫 앨범은 1998년에 발매된 <Beauty Salon>이라는 미니 앨범이었고 이후 <Sign>(1999), <Private Music>(2001) 등의 앨범을 발매한 뒤 지난 해에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4번째 앨범 <Drawing>을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정규 앨범 외의 활동으로는 TV 광고 음악이나 <Natural Beauty Basic> 시리즈 앨범을 비롯해 여러 모음집 앨범에 자신들의 자작곡과 유명 팝음악의 커버 버전을 싣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되는 앨범 <Drawing>은 BTV의 4번째 앨범으로 모두 10곡 이하의 곡을 담은 미니 앨범의 형태를 취했던 이전 3장의 앨범들과 달리 1시간 분량의 13곡을 담고 있어 이들의 진정한 정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전 앨범에서 4곡을 다시 노래했기 때문에 BTV의 음악의 전반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한편 지금까지 BTV는 나름대로 분담 체제에 의해 앨범을 만들어 왔는데 모든 과정에 걸쳐 BTV의 세심환 손길을 거치는 이러한 방법론은 이번 앨범에서도 유효하다. 여전히 준코 와다가“Altogether Alone”와 마이클 잭슨의 노래로 유명한 “Rock With You”를 제외하고 모든 곡들을 작사하고 작곡했다. 그리고 슌지 스즈키로는 이 곡들의 연주를 리드하고 또 녹음과 믹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앨범 <Drawing>은 일본 음악 개방을 접하면서 아무로 나미에 같은 일본 대중 음악의 첨단에 위치한 음악들만을 예상해왔던 국내의 감상자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BTV의 음악이 일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은 사운드와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에는 목가적인 포크와 도시적임 모던 팝, 그리고 70년대의 감수성이 적절히 혼합되어 있다. 어찌 보면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저 멀리 스페인의 Siesta 레이블에서 발매되는 발견되는 한 낮의 정서와 70년대의 감수성을 담고 있는 일련의 앨범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처럼 BTV의 음악은 지역성을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접근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들이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를 사운드의 기본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정서적 보편성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BTV의 음악은 굳이 일본 음악이라고 구분하고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고 아날로그적인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평범한 대중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은 그 장단점을 따지기 전에 곧바로 감상자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무장해제된 감상자는 BTV의 음악을 배경으로 필자처럼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삶의 작은 부분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정서적 파급력은 가사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된다. 특히 시간의 흐름, 추억,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등을 성숙한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가사는 분명 일반적 연애담에 그치고 있는 다른 대중 음악의 가사와는 차별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절로 감상자는 BTV의 노래를 들으면서“돌이킬 수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의 엄숙함을 (봄 따라가면 Haru Wo Tadoreba) 새삼 깨닫고 불어오는 바람에 지난 시간을 (바람 부는 날에 Kaze No Aruhini) 추억하며“햇볕이 잘 드는 식탁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따뜻한 생활과 평화로운 세계”를 (Sign)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음악과 함께 직접 이해하기란 우리 한국의 감상자들에게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로지 음악만으로도 이 관조적이고 여유 있는 정서는 충분히 전달된다고 생각된다. 표지만큼이나 여백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쿠스틱 중심의 편안한 사운드와 차분하게 흐르는 보컬은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상쾌하게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가사의 내용을 그대로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BTV는 2002년부터 지속적으로 일주일에 두세 차례 시내의 카페에서 노래를 한다고 한다. 카페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음악을 듣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누구를 만나거나 숙제처럼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노래는 그다지 카페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카페의 사람들 사이를 공기처럼 부드럽게 파고들 수 있는 음악이 바로 BTV의 음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세한 일상을 그리듯-Drawing! – 노래하는 BTV의 음악은 그저 하나의 가구처럼 사람들의 일상 중 한 때를 부드럽고 아늑하게 만드는, 어쩌면 카페라는 도시적인 공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BTV는 자신들의 음악을 특정 장르나 스타일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Pop”음악이라고 소개한다. 단순히 목소리만을 의미하는 “Be The Voice”라는 그룹의 이름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대중에게 쉽고 편안하게 다가서는 그런 음악을 하겠다는 말일 텐데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음악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니다. 앨범 수록 곡 중 “Popular Song”의 가사처럼 “누구의 노래인지도 모르는 채로 몇 번이고 혼자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언젠가 깊이 사랑했었던” 멜로디, 그리고 “언제라도 빛이 바래지 않는” 옛 명곡으로 남을 수 있는 음악들인 것이다. 따라서 일본 문화 개방의 경제적 문화적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기에 앞서 BTV의 이번 앨범은 순수하게 음악적인 차원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