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많은 사람들은 스무드 재즈를 즐겨 감상하면서도 정작 그 평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스무드 재즈가 도시적 정서, 분위기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나머지 즉흥 연주를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도외시 하는 등 재즈적인 맛을 상당부분 잃어 버렸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이로 인해 음악에서 연주자의 개인적 부분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스무드 재즈를 진지하지 못한 음악으로 보게 만든다. 이것은 필자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또 사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재즈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연주자체에 집중한 흐름과 그 연주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효과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경우가 공존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치열하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주를 위해 애쓰고 있는 진보적인 흐름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팝적인 감성을 지닌 스무드 재즈라는 스타일이 똑같이 “재즈”라는 분류 속에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존에는 절대 가치의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음악은 사실 잘 만들어진 음악 그렇지 못한 음악으로 분류될 수 있어도 스타일 자체가 무조건 하급으로 취급당해야 할 음악은 없다. 이는 스무드 재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만약 스무드 재즈가 그 자체로 저급한 음악이라면 출중한 여러 연주자들은 결코 스무드 재즈를 자신의 주된 연주 스타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크리스 보티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적 정서의 <A Thousand Kisses Deep>
그의 통산 6번째이자 Sony/Columbia에서의 3번째 앨범인 이번 <A Thousand Kisses Deep>은 스무드 재즈의 모범적인 정서를 잘 담고 있는 동시 연주자의 음악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앨범이다. 이 앨범은 분명 스무드 재즈 특유의 도시적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현대적 방법으로 음악들이 만들어지고 연주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계적인 처리 속에서 인간적인 정서가 2차적으로 피어 오른다는 것이다. 이 앨범에 담긴 모든 곡들은 몽환적인 맛이 있다. 이것은 곡의 템포가 빠르고 느리고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작곡한 곡이건 아니면 기존에 널리 알려진 곡이건 상관없이 그의 트럼펫을 거치면 모든 곡은 감상자를 가상의 현실로 빠져들 게 만든다. 필자의 경우는 그의 음악에서 종종 도시의 밤을 바삐 달리는 차들의 행렬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렬, 아무런 감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그 장면의 연상을 통해 소외감,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느끼곤 한다.
크리스 보티식 콘트라스트
이러한 특성은 단지 그의 음악적이 스무드 재즈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다. 크리스 보티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이러한 정서적 효과는 음악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보통 스무드 재즈가 범하기 쉬운 오류는 일렉트로닉한 사운드의 반주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솔로를 펼치는 연주자가 그 반주에 동화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 인간이 연주하는 것인데도 기계적인 느낌이 나는 연주들이 많다. 그러나 크리스 보티는 반주를 트럼펫을 위한 배경의 차원으로 사용하여 절묘하게 자신의 트럼펫을 살리는데 이용하고 있다. 부드럽게 설정된 공간에 파스텔 톤으로 스며드는 신디사이저 연주와 단속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흐르는 리듬의 연속은 분명 여타 대중 음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반주는 다른 스무드 재즈의 경우와 달리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을 흡수하지 못한다. 이것은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이 지닌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이다. 그의 트럼펫은 간섭을 매우 싫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트럼펫은 오로지 혼자서 있는 것을 즐기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의 트럼펫은 늘 자신만의 공간 속에 머무르고 있다. 앨범의 첫 곡 “Indian Summer”에서 들리는 그의 트럼펫을 잘 들어보자. 그의 트럼펫 사운드는 상당한 잔향(Reverberation)으로 인해 주위에 커다란 공기의 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Ever Since We Met”같은 곡에서 들리는 뮤트(Mute)된 트럼펫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경우에는 가냘프고 얇은 트럼펫 주위에 설정된 공간이 더 커져 보인다. 이러한 그의 트럼펫은 무심한 반주와 섞이지 못하고 일정 거리를 물러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로 이러한 크리스 보티식 콘트라스트(Contrast)가 그의 음악이 지닌 도시적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이렇게 그의 공간 확장적인 면이 강한 트럼펫은 솔로만으로 매우 충만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위해 단순히 피아노 반주 위에서 연주하고 있는 <My Funny Valentine>과 <Love Gets Old>를 들어보자. 피아노 반주가 매우 단순한 이 두 곡의 연주에서도 그의 트럼펫을 감싸는 공간적인 느낌은 테마가 지닌 우울하고 쓸쓸한 맛을 더 강화시킨다. 마치 그 소외감을 즐기기라도 하듯 그의 트럼펫은 피아노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 것만 같다.
어쿠스틱적 감각의 편곡
한편 이 앨범은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매우 섬세한 부분까지 장인적으로 고려된 면을 보인다. 이것은 그룹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 편곡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Ever Since We Met”이나 “She Comes From Somewhere”같은 곡의 크레딧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참여하고 있는 연주자들 비롯해 많은 사람이 공동 작곡자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보아 연주를 하면서 연주자의 악기 등에 맞추어 즉석에서 편곡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단순하고 연주자 개인의 특성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반주이긴 하지만 선율적이면서 감정적 과장을 하지 않는 트럼펫 아래에서 분위기를 형성하는 과정은 일반 어쿠스틱 재즈의 반주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 앨범의 타이틀 곡 “A Thousand Kisses Deep”의 편곡은 앨범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이 곡은 필자도 크레딧을 보기 전까지 유명한 포크 가수 레너드 코헨의 곡을 편곡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새로움만큼이나 이 곡이 주는 정서적 감동은 단연코 이 앨범의 백미다.
사실 필자는 그 동안 크리스 보티의 음악을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왔다. 그러한 들음은 감상보다는 청취에 가까운 것으로 크리스 보티의 음악을 듣는 순간 다른 용무 중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크리스 보티의 음악이 스무드 재즈라는 생각에, 그래서 이런 음악은 그저 배경으로 플레이 해놓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스무드 재즈라는 스타일에 맞는 감상법일 수 있겠지만 이번 글을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음악만을 감상하면서 그의 음악이 단순히 달콤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그 기저에는 상당한 음악적 고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저 대충 만드는 음악이란 없으며 정성으로 만든 음악은 그 스타일에 상관없이 감상자에게 정서적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크리스 보티의 <A Thousand Kisses Deep>은 음악으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